나는 희곡과 음악을 좋아한다. 당연히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좋아하며 이 연극과 음악이 어우러진 뮤지컬 역시 좋아한다.

먼저 밝혀둘 것은, 나는 희곡과 연극에 있어선 석사 2개를 취득한 나름 매니어이다. 아직 나이가 많지않아 더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동나이대에선 이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취득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음악은 그렇지않다. 아주 좋아하긴 하지만,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다.

나는 70,80년대 하드락 중 딥 퍼플과 레드 재플린을 좋아한다. 물론 메탈리카나 KORN과 같은 밴드들을 거쳐서 온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음악에서도 깊이 들어가면 '구조'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멜로디를 중시했다. 그래서 멜로디가 위주가 된 헬로윈이나 데프 레파트같은 밴드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음악을 오래 들을수록 곡의 구성이 눈에 들어오더라.

그래서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드림 씨어터를 당연히 좋아하게 되었다.

메탈리카도 처음엔 대중성있는 5집 앨범의 곡들을 좋아하다가

언젠가부터 곡의 구성과 짜임새. 즉 구조에 빠져들게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칼리카 곡은 2집의 Fade to Black이다.

그런데 말이다.

메탈리카를 수천수만번들으면 반드시 지겨워 진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귀를 파고 드는것이 바로 레드 재플린과 딥퍼플이라는 거대한 존재이다.

나는 요즘 딥 퍼플의 음악에 빠져사는데 April... 정말 압권이다.

결국은 어디까지 가느냐...

결국은 레드 제플린으로 가더라.

왜냐고?

멜로디에서 곡의 구성으로 갔다고 했지? 그 곡의 구성 다음의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가?

음악에서는 리듬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구조 속에서 또 구조를 뛰어넘는 모호성과 즉흥성이라고 할까?



나는 하드락에서 점점 블루스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이야기를 장황하게 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희곡도 그런 깊이의 단계가 있다는거다.

물론 절대 수준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평가들은 그 깊이의 수준이 있다고 믿긴 하더라마는......



.



희곡세계에서 레드 재플린과 비슷한 작가를 꼽으라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안톤 체홉을 꼽겠다.

락 매니어들이 궁극으로 도달해 결국 헤어나오지 못하는 끝판 대장이 레드 제플린이라면

희곡세계에선 안톤 체홉이 그러하다.

(농담이지만 딥 퍼플은 헨릭 입센에 대응하면 꽤 적절할 듯 ^^)


안톤 체홉의 작품은 레드 재플린의 음악처럼

처음에 귀에 확 들어오진 않는다.

그런데

괜히 신비롭고, 무언가 어떤 세계가 웅크리고 숨어있는 것이 본능적으로 직감된다.

이게 중요하다.

'직감'이라는 것.

직감은 이성과는 다르다.

감성과도 다르다.

이성과 감성이 교묘하게 혼용되어 있는 것이다.


안톤 체홉의 작품은 사실주의계열의 작품이므로

당연히 이성적인 면이 있다.

무대구조가 세밀하고 극적인 행동과 무대환경적 요소 모두가 세밀하고 사실적이다.

그러나 안톤 체홉의 대사는 또한 사실주의를 뛰어넘는다.

극적 행동이 사실적으로 보이나

모든 인물들은 표류하고 있고.

각자의 섬에 갖혀 각자의 세계를 편린한다.


안톤 체홉의 작품은 레드 제플린의 작품처럼

모호하고

혼재되어 있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직관적이다.

사실주의 (하드 락) 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썼지만

그 속엔 수많은 장르가 뒤섞여있다.


체홉의 작품 속엔

표현주의적 요소도 (세 자매의 후반부 뚜젠바흐가 죽음을 직감하는 장면에서 무대 뒤에서 흔들리는 자작나무숲의 흐느적거림이...)



낭만주의적 요소도 (갈매기의 2막과 3막에서 니나와 뜨리고린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



부조리극적 요소도 (세자매 마지막 세자매의 대사를 자세히 읽어보라. 그게 부조리극이지 뭔가? 안톤 체홉의 모든 인물들은 고립되어 있고 자신만의 세계를 떠돈다. 또한 안톤 체홉의 작품은 극적구성에 있어 비약과 생략이 극심하다)

있다.

심지어는 서사극적 요소도 있다고 본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극적행동의 불일치,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와 같이 기묘하게 끼어드는 무대환경적 요소들....)



그런데


이거 맛들이면 큰일난다.

난 큰일났다.


체홉의 이 묘한 맛에 빠져버리니까...

(커피와도 좀 비슷하다. 내가 커피도 좋아하는데, 커피도 살짝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고, 감미로우면서도 텁텁하고....혼재되어 있지 않은가)

헤어나오지를 못하겠다.


내 주변에서 안톤 체홉을 잘못 만나서 신세 망친사람 많이 봤다.

잘나가던 외과의사가 다 그만두고 연극하겠다고 한예종에 오거나

펀드매니저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연극하는 일.

그런 일들이 너무 많다.



.


레드 재플린처럼, 커피 처럼....

안톤 체홉의 작품은

모호하며

감각적이며

즉물적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을 사랑하는지 연구해봤더니 답이 나온다.

그래.


그게 인생인 것이다.


최고의 예술이 무엇이냐?

나는 평론가로서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해야하는 위치에 서있다.

나는 레드 제플린과 커피와 안톤 체홉에서 그 답을 찾았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음악에서 멜로디 다음 단계가 구조 그 다음 단계가 리듬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고 했고


연극에서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불분명한 경계, 그 모호함이 궁극의 세계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예술의 세계는 어떤 깊이의 단계란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최고의 예술은 무엇일까?


내 답은 이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바로 

인생을 닮은 예술이다.

혹은, 그 인생을 닮아가는 예술이다.




닮아간다는 표현이 더 좋다.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알 수 없기에 

오늘도 알아가고자 노력할뿐이다.


그게 예술인거다.



인생 속에는

환희도 있고 행운도 있지만


그 수면 아래엔 훨씬 더 깊은


고독과 

절말과 좌절과

연역함과

불행과

두려움이 있지 않은가?



그 모두를 닮아가는 예술.

그 모두를 감싸안는 예술.


나는 그게 궁극의 예술이며

우리가 가야할 예술의 길이라 생각한다.



이제 알겠다.


내가 왜

레드 제플린과


안톤 체홉과


커피를 사랑하는지.


왜 연극을 사랑하고, 희곡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아직도 무대를 동경하고 사랑하는지...




그들은

인생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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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힘줄

강  정/ 키스

 

 

 

 

 

시적힘줄

 

 

시에도 힘줄이 있나보다. 강정의 시를 읽으면 남성의, 그리고 야생동물의 거친 힘줄이 떠오른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실내에서 잘 관리한 세련된 무엇이 아니다. 거친 들판에서 햇빛을 받아 단단해진 구리빛 몸. 그 몸의 껍데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힘줄이다. 힘줄은 피부 아래, 혈관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어떤 내면적 힘의 원천이다. 그것은 피와는 또 다른 무엇이다. 말하자면 피보다 더 질기고 단단하고 억척스런 생명의 뿌리다. 힘줄은 질기다. 그 질긴 힘으로 온 몸의 압력을 홀로 지탱하고 있다. 강정의 시는 힘줄이다. 그의 시는 질기며, 거칠며,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고 그의 시는 그 질긴 근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압력들을 지탱하고 있다. 거대한 고래와 사투를 벌이는 어부의 힘줄처럼, 그는 ‘생명’의 거대한 아픔을 지탱하고 있다. 시인 강정에게 산다는 것, 그의 시에 흐르고 있는 과도한 ‘생명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짝짝 신의 볼기를 치듯 허공을 굴착하던 투전꾼들의 폭언이 내 몸 깊숙이 박혀있다

남들이 써놓은 문장에 화들짝 놀랄 때마다

그때의 뜨겁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몸을 훑어 내린다

내 음성에 배인 빙초산 냄새를

가끔 사랑으로 의역하던 이들 앞에서

네발로 기며 쏟아냈던 불덩이는

그때 벌어진 상처를 열고 숨어든 눈먼 짐승 의 울음이었다

 

-「달빛을 받는 체위」中

 

 

 

 

 

 

 

그가 끊임없이 생명력을 탐하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근원적 아픔을 답습하는 지 이 시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내면적, 존재론적 아픔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내면의 상처, 개인적 인생의 아픔에서 오는 현실과의 부조화 문제가 첫 번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런 개인적, 내면적, 프로이트적 잠제의식, 환경적이 아닌 그저 산다는 것의 허무, 산다는 것의 무의미함, 그 존재 자체에서 오는 고통이다. 이 첫 번째 아픔과 두 번째 아픔의 교집합에서 시인 강정이 말하는 ‘키스’가 탄생된다. 시인 강정이 말하는 사랑은 절대 감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내 음성에 배인 빙초산 냄새’이다. 그것은 바닷가 부두에서 달빛을 받으며 놀음하는 어부들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 거친 인생 앞에서, 바다라는 거대한 망망대해를 떠도는 어떤 인생의 무서운 환경아래서 시인은 ‘그때 벌어진 상처를 열고 숨어든 눈먼 짐승의 울음’을 쏟아낸다. 이것은 사랑의 따뜻한 고백이 아닌 ‘네발로 기며 쏟아내는’ 짐승의 불덩이이다.

이처럼 그에게 사랑의 고백은 울부짖음이다.

 

 

 

 

 

 

 

고통의 넘나듬, 그것이 ‘키스’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 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 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키스」中

 

 

결국, 그의 키스는 남녀간의 연애를 뛰어넘는 종족간의 번식이며, 음울한 환경의 넘나듬이며 그 고통의 농밀한 나눔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시의 매력이 탄생한다. 그의 시가 지극히 개인적인 아픔을 말하고 있으나 그의 시가 보편적 매력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그가 시를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랄하고, 깜찍하고, 귀여운 사랑. CF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이미 만들어진 사랑의 식상함 앞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힘줄의 거친 사랑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인스탄트의 사랑, 아무 의미없는 껍데기뿐인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그런데 그 나머지 반쪽을 채울 뜨거운 힘줄을 강정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랑은 그저 번듯한 오락이 아니다. 아픔의 교감이며, 상처의 넘나듬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색다르고 어쩌면 진실되다.

 

 

 

 

 

 

 

관념어의 주술

 

 

그의 시는 투박하다. 시적인 비유가 감각적이지 못하다. 시집 전체에서 몇몇 감각적인 시어가 있지만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투박하다. 이 투박함이 어디서 기인하는가 하면 그의 느슨한 관념어에서 온다.

 

 

심장에서 솟구치는 애액들이 식도를 달 군다

먹은 걸 토하다 보면 머릿속에 달이 떠 오르기도 한다

새벽 길가 하수구 수챗구멍에 고개 박 은 채 구토하던 남자를 향했던

강간충동이 나의 진짜 욕망이었다

-「달빛을 받는 체위」中

 

 

 

 

 

심장에서 솟구치는 애액들이 식도달군다’ 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심장, 솟구치는, 애액, 식도, 달군다......’ 이 정도로 한 문장 안에서 비슷한 관념어들을 쏟아내는 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쏟아냄이며 어떤 관점에서는 느슨함이다. 강정의 시는 전체적으로 이렇게 비슷한 느낌의 시어를 한 문장 안에서 마구 쏟아낸다. 이러한 비슷한 느낌의 관념어가 그의 시에는 너무 많다. 남성적이고 거칠고, 즉물적이나 그것이 너무 과도하게 쏟아진다. 그러나 강정은 이 쏟아짐을 하나의 즉물성으로 그의 시적 스타일로 확립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랩과 같은 시적언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슬랭과 욕설이 여과없이 쏟아지는 것, 그러나 이 상투적이고 즉물적인 쏟아짐은 그의 시적 구조력 안에서 빛을 발한다. 그 다음 행에, 시인이 관념어를 잘 이해하고 있음이, 그래서 그가 시적 구조력을 갖춘 시인임이 잘 나타난다.

 

 

 

 

‘먹은 걸 토하다 보면 머릿속에 달이 떠 오르기도 한다’

‘새벽 길가 하수구 수책구멍에 고개 박 은 채 구토하던 남자를 향했던 강간충동이 나의 진짜 욕망이 이었다‘

 

 

 

 

 

아래 문장에선 관념어가 아닌 구체적 행동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달이라는 시어를 통해 공간을 창조한다. 그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달빛 아래 구토하는 남자’라는 상황이 있기에 앞서 구토했던 관념어의 쏟아짐들이 충분히 공간적으로 구조를 갖춘다. ‘심장에서 솟구치는 애액들이 식도를 달군다’ (A), ‘먹은 걸 토하다 보면 머릿속에 달이 떠오르기도 한다’ (B), ‘새벽 길가 하수구 수책구멍에 고개 박은 채 구토하던 남자를 향했던 강간충동이 나의 진짜 욕망이었다‘(C)라고 할 때, A에서 마구 쏟아진 관념어는 뜨거움과 격렬함이라는 이미지를 성취하고 B에 이르러 디테일한 상황과 공간위에서 그 모호함을 벗는다. 결국 시인의 모든 힘이 모아지는, 그래서 시적 미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C인데, 시인은 C에서 ’구토하는 남자를 향한 강간충동‘이라는 상황의 역설, 또는 역겹게 비틈으로 그의 내면의 구토, 그리고 역겨운 욕망의 근원성을 구조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즉, 그는 매우 무책임하고 거친 랩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거침 속에 탄탄한 전략을 숨길 줄 아는 전략적인 시인이며, 뛰어난 관념어의 주술사이다.

 

 

 

 

 

 

시인의 말을 빌어 다시 한번 그의 시를 정의한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키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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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드라큘라>를 봤다.

김준수, 조정은의 캐스팅.

20자평 : 지킬앤하이드 시즌2

-지킬앤하이드 시즌2라는 말은
좋은 의미로는 지킬앤하이드만큼의 퀄리티가 되는 간만에 제대로 나온 코리안스타일 하이엔드뮤지컬이란 뜻이고 (여성관객들에게 어필할 요소를 다 갖추고있음)
부정적 의미로는 지킬앤하이드의 성공요소의 중복 재탕 삼탕 이란 말이다. 작곡가 와이드혼은 유난히 한국에서 과대평가된 작곡가다. (형편없는 실력에 비해) 해외에서 전혀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는 작곡가가 그의 현주소. 이번 작품 <드라큘라>도 해외에선 전혀 흥행하지못했다. 근데 한국에선 일년에 몇편씩 초대형 뮤지컬을 공장찍어내듯 생산한다.

-형편없는 작곡에 비해 조명, 무대, 영상 등 국내 스텝진의 실력은 월등했다. 무대활용, 공간연출이 작품을 잘 소화했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창조해냈다.

-개인적으로 아이돌 출신이 뮤지컬 배우를 하는것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이 작품은 예외다. 원래 김준수 보컬이 좀 탁하게 긁히는 스타일인데 그게 드라큘라 작품과 아주 잘 어울렸다. 지킬하면 조승우이듯 이번 드라큘라는 김준수를 위한 최적의 무대인듯.

반면 <미녀와 야수>에서 그 기막힌 깜찍한 벨을 연기했던 조정은이 '비련의 여주인공'이란 한국식 성격창조에 갇혀서 (분명 연출가가 그렇게 강요했을 것이다) 전혀 그녀만의 색깔을 드러내지못한건 진짜 아쉬운 점.

-관객의 99%가 여성이고 그 여성관객 중 상당수가 일본인인듯했다. 용품을 구입하려 자유소극장까지 줄서있는걸 보며 스타파워와 예술경영의 상관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여성관객들이 '빠순이들 때문에...' 라며 뭐라 투털거리는걸 많이 들을수 있었는데, 모두가 '빠순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빠순이'가 아닌 아이러니한 상황...

ps : X - JAPAN 코스프레 30년만에 부활한건가? 철지난 코스프레가 먹히는게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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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캣츠> 오리지널 캐스팅 내한공연을 봤다. (삼성전자 블루스퀘어관)
공연비평 전공자이면서도 겨우 이제서야 이 유명한공연을 봤다는게 좀 민망하지만 후기를 남겨본다면

뮤지컬 <캣츠>는 가벼운공연이 아니다.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에 뒷골목 거리를 배회하는 '뒷골목 고양이'들의 정서가 있다. 그것은 고리끼 밑바닥 인물들의 뮤지컬판 은유라고도 할수있다. 아무리 화려한 과거와 현재를 가지고있다해도 그들은 고양이일뿐이니까. 즉 작가는 고양이의 의인화는 의도했지만 고양이의 정체성 (이기적 인간의 틈에 부대끼며 살아가는 고양이들의 실존) 까지는 부인하지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상류의 은유가 아니라 하류의 은유가 된다.

이 철학적 은유를 드러내는 중요한 축을 잡는 캐릭터로 존경받는 원로이자 선지자인 - 올드 듀터러너미 Old Deuteronomy, 과거엔 아름다웠으나 현재는 늙고 추한 몰골로 공동체에서도 환영받지못하는 그리자벨라 Grizabella, 과거에 사로잡힌 명배우출신 고양이 거스 Gus가 있다.

이들은 모두 화려했던 과거를 기억하지만 현재의 모습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의 모습은 바로 올해 한예종 연극원 지정희곡으로 선정된 유진 오닐의 <얼음장수 오다>가 연상된다. 그러나 <캣츠>의 서사가 고리끼나 유진 오닐의 인물들처럼 파멸로 끝나지않는 이유는 그들의 상승의지에 있다. 기꺼이 이방인을 단 한명의 '선택자'로 선택하는 고양이들의 존중과 사랑이 상승의지로 나타나 뮤지컬의 클라이막스 장엄한 승천장면으로 이어진다.

얼핏 <캣츠>의 이야기는 각 고양이들의 특성이나 소개하다 유명한 노래 '메모리' 로 문득 끝내버리는 '전형적인 뮤지컬'다운 형편없는 이야기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획일적이고 익숙한 스토리라인에 집중하며 보기보단 풍성한 은유와 특유의 분위기, 그리고 장면들의 상징적 연결에 주목해본다면 뮤지컬 <캣츠>의 참 맛을 즐길 수 있다.

나도 뮤지컬을 보기전엔 그 절절하고 아름다운 엔드류 로이드웨버의 명곡 '메모리'를 왜 저 초라하고 거지같은 고양이가 불러야하는지 의아해했다 (간지가 안난다)
뮤지컬을 보고난다음에야 생각이 확실해졌다.
'메모리'는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이다. 아름답게 표현되어야 한다. 최대한. 그리고 그 아름다운 곡을 부르는 고양이는 더욱 더 못나고 비천해야한다.

T.S 앨리엇의 우화 <완벽한 고양이가 되기위한 지침서>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란 점이 이를 증명한다.

이 뮤지컬은 인생에 대한 낭만을 노래하는 뮤지컬이 아니라 인생을 직시하고 현실속에서의 관점과 은유를 드러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가 느끼는 인생의 거대한 무게, 거대한 자본의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탁월한 비유(우화)가 도시 뒷골목 고양이들의 뮤지컬 <캣츠> 인 것이다.




Practical cats, dramatical cats
Pragmatical cats, fanatical cats
Oratorical cats, delphioracle cats
Skeptical cats, dispeptical cats
Romantical cats, pedantical cats
Critical cats, parasitical cats
Allegorical cats, metaphorical cats
Statistical cats and mystical cats
Political cats, hypocritical cats
Clerical cats, hysterical cats
Cynical cats, rabbinical cats

<뮤지컬 캣츠 오프닝 넘버 Jellicle Songs for Jellicle cats 가사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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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4대비극을 꼽는다.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그의 희극 중 대표작인

<한여름밤의 꿈>이다.

그것도 전형적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희극인 4막까지가 아닌

단 5막만 따로 떼어내서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즐기는 이유는 너무나 다양하다.

내가 셰익스피어에 관심이 있어

한예종과 교류협정이 되어있는 고대 도서관을 자주 갔는데

한층 가득 세익스피어 관련 책들이 꽂혀 있어서 놀랐다.

그런데 층과 층 사이에 창고같은 또하나의 층이 있는데

호기심에 들어가봤더니

지금까지 봤던 한층 이상 부피가 되는 면적에

또 셰익스피어책이 가득 쌓여있었다.

보존서고에 까지 갔었던 것.

그리고 그 방대함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물론 수많은 이유가 있겠지.

라임이라든가

극의 형식이라든가

당시의 연극적 형식을 잘 응용한 문학적인 대사라든가.

과감한 전개라든가

많겠지만

나는 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점으로

'통찰'  그 자체를 꼽고 싶다.

셰익스피어에게서 통찰을 읽지 못하면

아무것도 읽지 못한것과 마찬가지이다.


그<한여름 밤의 꿈>의 5막은

바로 미래 예술.

더 자세히 말하면

500년후에 도래할 연극예술에 대한 예견이다.

500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인간과

예술을

관통하는

시선.

그것이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진짜

비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앞으로의 예술, 앞으로의 대중문화에 대해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겨우 몇년뒤를 예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자. 오늘날의 예술과 문화를 보자.

카오스나

아방가르드나

과격하고 선정적이고 금기를 마구 깨는 파격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

미래 예술

앞으로의 예술과 대중문화의 방향은 그렇게 계속 금기를 깨는 방향으로 나갈 것 같은가?


우리는 흔히

최선의 것. 미래지향적인 것을

아방가르드적인 것과 동일시한다.

괴랄하고

무언가 파격적이고 혼란스럽고 시끌벅쩍하고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 속에서 뭔가 미래지향적 것이 숨어있으리라 섣불리 속단한다.


그러나,

아니다.

이미 아방가르드는 철지난 유행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났다.



쉽게 한번 살펴보면

대중문화에서 오늘 유행하는 스타일이 더 과격한가? 아니면 80/90년대가 외형적으로 더 과격한가?

의외로

80/90년대가 오천육만배는 더 과격하다.

마릴린맨슨이나

그 이전의 강력한 헤비메틀/ 데스메틀 밴드들을 생각해보라.

80년대가 훨씬 더 강렬했고, 자극적이었다.


연극도 마찬가지다.

일본연극을 봐도 스카 고헤이의 붉은 텐트같은 과격하고 파괴적인 스타일의 연극은

이미 유행이 지나도 한참이 지난 것.


영화도 마찬가지.

심하게 고어틱한 장르는 이미 유행이 지난지 오래다.


뭐 더 쉽게 말하면

네가 입고 다니는 옷을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90년대 후반에 유행하던 스타일을 생각해봐라.

지금과 비교했을때

그때가 오히려 더욱 더 아방가드르, 포스트모던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매우 클래식해지고 점잖아졌다. 패션의 지향점 자체가.


더 이상 예술에서

파격은

새로움이 아닌 것이다.

파격만으로 풀 수 있는 것은

이미 수십년전에 다 해 본 거다.

선배들이.

백남준 같은 아티스트들이.

다다운동 같은 걸로.

포스트 모더니즘의 끝을 찍어버린 것.

예술의 목에 이미 칼을 내리 찍은 것이다.


자.

지금 한국 대중문화 트렌드는 무엇인가?

나가수나 슈퍼스타K 같은 대중음악의 트렌드를 보면

십수년전 HOT 젝스키스등이 유행했던 시절에 비해

훨씬 더

클래식과 가수로서의 기본실력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문화의 소비자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


철학,  미학적 담론이나

영화분석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

진중권이 불러온 미학오디세이나

여러 인문학에 대한 조용한 관심을 돌아봐도 (물론 그 깊이는 예전만 못하지만, 대중성에선 예전보다 훨씬 파급력있음)

오늘날 예술은

아방가르드를 넘어

분명하게

클래식을 향해 가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젠

대중들의 눈높이도 충분히 높아졌다는 것.

대중예술

대중음악

상업적인 예술을 하기 위해서도

기본기.

예술적인 기본소양과 실력

내공이 없이는

버티기가 힘든 시대가 되었고


앞으로

특히 이 글을 읽는 청소년들이

성장해서 한창 활동할 시기에는

더욱 더

그 기본실력이 강요되는 시기가 될 것이란 거다.


이젠 얼치기 예술은

대중예술에서조차 발붙이지 못하는 거다.

그만큼 대중의 안목이 성장한거지.


슈퍼스타 K에 나오는 음악적 수준도

이젠 상당한 수준인 것이다.


이젠

현란함

껍데기만으로는

승부하기 힘든 시대가 점점 올 것이다.


우린 이미

그런 껍데기에 식상해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클래식이 부각된다.



요즘은 드라마를 보면서도 연기기본기를 따지는 시대다.

호세? 인가 뭔가 하시는 분이 많이 욕을 먹는것도 그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것.


결론

한예종의 미래는 밝다.

예술에서의 기본기가

의외로 상업적

대중적

분야에서 오히려 크게 각광받을 날이 반드시 온다.


앞으로 더욱 더

대중예술의 눈높이는 높아져

기본기

클래식에

능한

한예종 출신들이 더욱 더 폭넓은 인정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네가 한창 예술가로 활동할 시기는 앞으로 20년후다.

그때의 예술과 대중문화를 예견하며 공부해라.


껍데기가 아니다.

알맹이다.

그리고

반드시

클래식으로 회귀한다.

네오클레식.


지금의 패션계를 보면

미래 예술의 스타일이 보인다.

클래식이 강세다.

앞으로는 더욱.

클래식을 강조하는 한예종이

그래서 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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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곡과 음악을 좋아한다. 당연히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을 좋아하며 이 연극과 음악이 어우러진 뮤지컬 역시 좋아한다.

먼저 밝혀둘 것은, 나는 희곡과 연극에 있어선 석사 2개를 취득한 나름 매니어이다. 아직 나이가 많지않아 더 높은 수준은 아니지만 동나이대에선 이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취득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음악은 그렇지않다. 아주 좋아하긴 하지만, 아주 높은 수준은 아니다.

나는 70,80년대 하드락 중 딥 퍼플과 레드 재플린을 좋아한다. 물론 메탈리카나 KORN과 같은 밴드들을 거쳐서 온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음악에서도 깊이 들어가면 '구조'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나도 처음엔 멜로디를 중시했다. 그래서 멜로디가 위주가 된 헬로윈이나 데프 레파트같은 밴드를 좋아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음악을 오래 들을수록 곡의 구성이 눈에 들어오더라.

그래서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는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 드림 씨어터를 당연히 좋아하게 되었다.

메탈리카도 처음엔 대중성있는 5집 앨범의 곡들을 좋아하다가

언젠가부터 곡의 구성과 짜임새. 즉 구조에 빠져들게 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칼리카 곡은 2집의 Fade to Black이다.

그런데 말이다.

메탈리카를 수천수만번들으면 반드시 지겨워 진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귀를 파고 드는것이 바로 레드 재플린과 딥퍼플이라는 거대한 존재이다.

나는 요즘 딥 퍼플의 음악에 빠져사는데 April... 정말 압권이다.

결국은 어디까지 가느냐...

결국은 레드 제플린으로 가더라.

왜냐고?

멜로디에서 곡의 구성으로 갔다고 했지? 그 곡의 구성 다음의 세계가 무엇인지 아는가?

음악에서는 리듬이라고 할까?

아무튼 그 구조 속에서 또 구조를 뛰어넘는 모호성과 즉흥성이라고 할까?



나는 하드락에서 점점 블루스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이야기를 장황하게 했다.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희곡도 그런 깊이의 단계가 있다는거다.

물론 절대 수준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평가들은 그 깊이의 수준이 있다고 믿긴 하더라마는......



.



희곡세계에서 레드 재플린과 비슷한 작가를 꼽으라면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안톤 체홉을 꼽겠다.

락 매니어들이 궁극으로 도달해 결국 헤어나오지 못하는 끝판 대장이 레드 제플린이라면

희곡세계에선 안톤 체홉이 그러하다.

(농담이지만 딥 퍼플은 헨릭 입센에 대응하면 꽤 적절할 듯 ^^)


안톤 체홉의 작품은 레드 재플린의 음악처럼

처음에 귀에 확 들어오진 않는다.

그런데

괜히 신비롭고, 무언가 어떤 세계가 웅크리고 숨어있는 것이 본능적으로 직감된다.

이게 중요하다.

'직감'이라는 것.

직감은 이성과는 다르다.

감성과도 다르다.

이성과 감성이 교묘하게 혼용되어 있는 것이다.


안톤 체홉의 작품은 사실주의계열의 작품이므로

당연히 이성적인 면이 있다.

무대구조가 세밀하고 극적인 행동과 무대환경적 요소 모두가 세밀하고 사실적이다.

그러나 안톤 체홉의 대사는 또한 사실주의를 뛰어넘는다.

극적 행동이 사실적으로 보이나

모든 인물들은 표류하고 있고.

각자의 섬에 갖혀 각자의 세계를 편린한다.


안톤 체홉의 작품은 레드 제플린의 작품처럼

모호하고

혼재되어 있고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직관적이다.

사실주의 (하드 락) 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 썼지만

그 속엔 수많은 장르가 뒤섞여있다.


체홉의 작품 속엔

표현주의적 요소도 (세 자매의 후반부 뚜젠바흐가 죽음을 직감하는 장면에서 무대 뒤에서 흔들리는 자작나무숲의 흐느적거림이...)



낭만주의적 요소도 (갈매기의 2막과 3막에서 니나와 뜨리고린이 사랑을 키워가는 과정이)



부조리극적 요소도 (세자매 마지막 세자매의 대사를 자세히 읽어보라. 그게 부조리극이지 뭔가? 안톤 체홉의 모든 인물들은 고립되어 있고 자신만의 세계를 떠돈다. 또한 안톤 체홉의 작품은 극적구성에 있어 비약과 생략이 극심하다)

있다.

심지어는 서사극적 요소도 있다고 본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극적행동의 불일치,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와 같이 기묘하게 끼어드는 무대환경적 요소들....)



그런데


이거 맛들이면 큰일난다.

난 큰일났다.


체홉의 이 묘한 맛에 빠져버리니까...

(커피와도 좀 비슷하다. 내가 커피도 좋아하는데, 커피도 살짝 씁쓸하면서도 달콤하고, 감미로우면서도 텁텁하고....혼재되어 있지 않은가)

헤어나오지를 못하겠다.


내 주변에서 안톤 체홉을 잘못 만나서 신세 망친사람 많이 봤다.

잘나가던 외과의사가 다 그만두고 연극하겠다고 한예종에 오거나

펀드매니저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연극하는 일.

그런 일들이 너무 많다.



.


레드 재플린처럼, 커피 처럼....

안톤 체홉의 작품은

모호하며

감각적이며

즉물적이다.


그런데


내가 왜 이들을 사랑하는지 연구해봤더니 답이 나온다.

그래.


그게 인생인 것이다.


최고의 예술이 무엇이냐?

나는 평론가로서 그런 질문에 대해 답해야하는 위치에 서있다.

나는 레드 제플린과 커피와 안톤 체홉에서 그 답을 찾았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음악에서 멜로디 다음 단계가 구조 그 다음 단계가 리듬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고 했고


연극에서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불분명한 경계, 그 모호함이 궁극의 세계라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예술의 세계는 어떤 깊이의 단계란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결국 최고의 예술은 무엇일까?


내 답은 이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바로 

인생을 닮은 예술이다.

혹은, 그 인생을 닮아가는 예술이다.




닮아간다는 표현이 더 좋다.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알 수 없기에 

오늘도 알아가고자 노력할뿐이다.


그게 예술인거다.



인생 속에는

환희도 있고 행운도 있지만


그 수면 아래엔 훨씬 더 깊은


고독과 

절말과 좌절과

연역함과

불행과

두려움이 있지 않은가?



그 모두를 닮아가는 예술.

그 모두를 감싸안는 예술.


나는 그게 궁극의 예술이며

우리가 가야할 예술의 길이라 생각한다.



이제 알겠다.


내가 왜

레드 제플린과


안톤 체홉과


커피를 사랑하는지.


왜 연극을 사랑하고, 희곡을 사랑하는지

그래서 아직도 무대를 동경하고 사랑하는지...




그들은

인생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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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대들의 진혼곡으로 풀어나간 햄릿의 꿈

 

-노래하듯이 햄릿

 

                                                                           intheatre



  연극이 혁명을 꿈꾸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을까? 연극이 위기를 감지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을까?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미래를 밝히는 시선이 연극이라고 믿는다면, 변화를 노래하고 새로움을 욕망하는 것은 연극예술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최근 젊은 연극인들의 활약은 특별히 오감을 자극한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우리 연극이, 언어가, 문법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 연극계를 들썩이게 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연극인들의 시도를 하나의 특징으로 묶거나 어떤 흐름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 작업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될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작업의 다양성, 정의되지 않고자 하는 끊임없는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밤의 꿈>, <연緣 카르마> 등을 통해 역동적인 움직임, 전통적 리듬감, 이미지로서의 연극언어를 보여주는 양정웅과 극단 여행자, <햄릿>과 <귀환> 등을 통해 문화와 정서를 초월한 보편적 공연언어, 소우주로서의 몸의 언어를 탐구해나가는 원영오와 극단 노뜰, <흉가에 볕들어라>, <지리다도파도파 설공찬전> 등을 통해 새로운 지점에서 문학언어와 내러티브에 다시 무게를 찾아주는 이해제와 극단 신기루 만화경 등, 오늘의 젊은 연극은 한 지점에서 시작되지도, 한 방향을 향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의 연극이 하늘 아래 새로 솟은 것도 아니요, 역사 이래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장점은 연극언어가 배우의 언어요, 공간의 언어라는, 선배들이 반복해서 강조해 온 “오랜 진리”에 충실하다는 것에 있다. 그들은 몸을 움직여 리듬과 의미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빈 공간을 완전히 새로운 시공으로 창조한다. 그들은 자신이 동인動因이 되어 관객을 움직이고 상상하도록 하는 것이 연극임을 안다. 그들은 막이 오르자마자 성급하게 제시되는 권위적인 언어나 고정된 의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극의 의미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극 안에서 생성되고 발전되고 찾아지는 것임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경향아래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로 이현주, 배요섭의 극단 뛰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하륵 이야기>, <상자 속 한여름밤의 꿈>을 통해 이미 지속적으로 인형과 오브제, 나아가 무대와 공연을 둘러싼 환경에 새로운 연극적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해오고 있다. 그들의 대표작 <노래하듯이 햄릿>을 통해 그들의 연극언어가 어떻게 무대화되었는지 살펴보자.

 

 

 

 

1.

 

 

  무대 위로 조명이 밝아오면, 제일 먼저 무대 앞의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무대는 잔잔한 조명을 받으며 호수 속에서 흔들린다. 햄릿의 고뇌, 그의 내면 속 흔들림일까. 무대 위엔 높은 언덕이 하나있고 그 뒤로 솟대처럼 나무들이 듬성듬성 꽂혀있다. 퇴색된 땅의 황량함과 그위에 이리저리 뒹구는 가면이며 해골등이 어스름한 저녁녘 질감과 어울려 이곳이 무덤지기들의 놀이터임을 암시해준다. 호숫가 물결위에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햄릿의 시선이 느껴질때쯤, 무대 왼편에서 흥겨운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노래하듯이 햄릿>에서 관객이 먼저 만나게 되는 이는 햄릿이 아니다. 눈물이 번진 기묘한 분장, 누덕누덕 기운 잿빛 옷을 입은 광대 4명은 수레를 끌고 들어오며 ‘낯선 햄릿’을 시작한다. 그들은 죽은 영혼을 인도해주는 진혼곡을 한바탕 흥겹게 불러제끼고 난뒤 관위에 걸터앉아 햄릿의 수첩 속 첫 대사를 읽으며 본격적으로 햄릿의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때로는 로맨틱한 대사를 남긴 햄릿을 조롱하기도 하고, 때로는 숙부와 거트루트에 대해 격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필리어와의 사랑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그들은 햄릿의 스토리에서 선택된 이야기들을 한바탕 흥겨운 놀이로 풀어놓는다. 이렇게 무덤지기 광대의 구조와 햄릿의 서사적 구조가 겹치면서 작품은 햄릿이 가지고 있는 비극적 의미를 광대들의 놀음으로 희화화한다. 광대들의 익살로 풀어진 햄릿은 햄릿 서사 구조의 타자화라는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기존 작품이 햄릿의 젊고 혈기 넘치는 모습에 주목하는 것과는 다르다. 광대들이 종이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햄릿의 이야기를 펼침으로써 관객과 햄릿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고, 아버지를 죽인 숙부, 그와 결혼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분개하고 고뇌한다. 한편으론 오필리아를 향한 사랑을 품고 있다. 이런 햄릿의 조각 난 내면은 광대들의 연기와 노래로 적절하게 외면화된다. 광대들이 걸쭉한 입담으로 햄릿의 행동을 평하고, 인형을 들거나 얼굴에 가면을 붙인 채 적당히 거리를 조절하는 사이 관객은 ‘너무 생각이 많은’ 햄릿을 덤덤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를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죽음도 괜찮은 것일까,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무엇을 남기는 걸까. 광대들이 끌어가는 <노래하듯이, 햄릿>은 이처럼 무거운 질문을 던지면서도 경쾌하고 냉소적인 어조를 잃지 않는다.

 

 

 

 2.

 

 

  연출자 배요섭이 무거운 이야기를 광대의 익살 속에서 푸는 것은 진혼굿의 형식을 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주제가 죽음과 삶을 화해시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뛰다’가 제시하는 화해의 방식은, 죽음 속에서 삶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이다. 다시말해, 타인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다. 기억을 통한 죽음의 극복이 ‘뛰다’가 파악하는 『햄릿』의 주제이며, 때문에 이들은 이를 <노래하듯 햄릿>의 테마음악으로 삼는다.

  수첩을 열어 “오필리어, 나 죽더라도 날 기억해줘 나도 널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는 구절을 읽는 첫 장면의 음악에서부터,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날 위해 울어주세요.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게”라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테마 음악이 반복된다. 작품 속엔 죽음을 삶의 일부처럼 그냥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자주 나온다. 인간의 사고가 갈 수 있는 극단까지 자신을 몰고갔던 햄릿, 본 연극은 스스로를 분열시키고 치열하게 번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는 그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죽음으로 이제는 다 끝났다. 다 되었다. 죽어서 까지 무겁게 지상에 가라앉아 있지 말고 좀 웃기도 하면서 밝은 빛을 따라 하늘로 가거라.....라는 위령제이다.

  슬픔을 그대로 놓아두면 삶이 무거워진다. 본작은 슬픔을 손상시키지는 않되 짓눌려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햄릿이라는 작품 자체가 가진 묵직함을 덜어주고 희극의 균형추를 달아줌으로서 슬퍼도 견딜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장미 어린 선율의 첼로와 피아노에 곡을 쳐지지 않게 해주는 퍼쿠션과 드럼연주가 이를 크게 도왔다. 광대가 극을 진행시키고 인형극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을 패러디 하는데에 적절한 포맷을 갖추었다.

 

 

 

3.

 

 

  작품에는 종이로 만든 가면과 인형, 붉은 천 등 다양하고 독창적인 오브제가 사용된다.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되는 28곡의 음악은 불협화음과 화음이 적절히 어우러져 아련한 슬픔과 서정성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햄릿의 인형이 인상적이었는데, 뭉크의 절규 속 인물처럼 눈물을 흘리는 듯 고뇌하는 표정이 햄릿의 특질을 잘 표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긴 천을 활용하여 몸체를 나타내는 인형놀림을 통하여, 사유하는 햄릿을 적절히 시각화하였다. 거트루드나 클로디어스의 가면도 흥미로웠으며, 다양한 소품과 무대 위에서의 장치변환도 재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공연의 가장 큰 미덕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소품들이 광대들의 손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해골 같은 햄릿의 얼굴에 나뭇가지를 갖다 대면 소심한 존재가 되고, 검은 우산을 갖다 대면 성난 고슴도치가 되고, 천은 그의 행동과 기분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햄릿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 외에도 죽음을 연상케 하는 관에서 나온 죽은 오필리어는 냄비에 흰실을 늘어뜨리면서 솟아오르는데 음악 효과와 함께 유령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무대 뒤켠에 장승처럼 나란히 서 있던 클로디어스와 거투루드는 어느 순간 생명을 얻어 무대를 압도하면서 그들의 권력욕과 탐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하였다. 이처럼 천과 소품들을 이용한 포퍼먼스는 무대라는 공간과 시간적인 제약을 넘어서서 인물의 갈등과 상처의 깊이를 표현해내고 있으며, 햄릿 속 정신세계를 무대위에 외면화하는데 성공했다.

 

 

 

 

 4.

 

 

 

  배요섭은 연출가의 글에서 “가장 진실하게 다가오는 건 자살한 오필리아의 무덤을 파면서 농담을 나누는 무덤지기들 이야기”라고 밝혔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은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다른 이의 수많은 죽음을 접하며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처럼 생각되는 그들의 시선’으로 ‘햄릿’을 바라봤다. 이 작품이 의미를 남기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햄릿이라기 보다는 햄릿에 대한 이야기인데 관객들로 하여금 이 해석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했다는데 있다. 다시말해 원작에서 무덤지기들을 뽑아내서 그들의 이야기로 푼 극의 형식,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다시 광대의 이야기로 일치시킨 설정이 가면과 소도구의 적절한 활용과 어울려 연출자는 일관되게 햄릿에 대한 이야기를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강요나 제약 없이 풍성해지는 담론의 장에 자연스럽게 관객이 참여할 수 있다.

 

  극단 뛰다는 햄릿의 꿈을 펼쳐 보여 준다. 네 명의 광대들은 <햄릿>의 모든 인물들을 투명하게 제 안에 받아들이고 그들을 대신해 사건을 재현해 준다. 동시에 광대들은 인물로부터 빠져나와 그들을 평가하고 사건을 논평하기도 한다. 사실 이 극의 재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는 ‘햄릿’의 저 유명한 극중극 장면조차 여기에서는 방금 전 무대 위에 펼쳐졌던 재료들을 축소시켜 만든 패러디물이 되고 만다. 광대들은 햄릿에게 너무 고뇌하지 말라고 조롱한다. 비극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뱉어내는 절규 속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이 없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비극성은 없다. 진지한 척 하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광대들의 질펀한 입담과 노래만 귓가에 아련하게 남을 뿐. 그나마 그도 사라지고 나면 바람 소리 황량한 이승을 멋쩍게 바라보는 자신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고뇌에 찬 진지함은 조롱당하고 오히려 웃음을 유발시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우리가 기대하는 비극성은 여기에 없다. 햄릿이 어떻게 죽었는지, 거투루드와 클로디어스가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런 것은 이 연극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수많은 햄릿 이야기의 하나이듯, 이 연극 역시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재해석’이라는 수식어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이것은 ‘극단 뛰다’의 햄릿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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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먼 자들의 도시 ( 원제 : Blindness )

 

-원작의 충실한 압축본

 

                                                                   intheatre

 

 

  서스펜스의 거장 '히치콕' 에게 "「죄와 벌」을 영화화 할 생각이 없습니까? " 라고 물었더니 히치콕은, " 그 작품은 이미 완성되어있기에 제가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히치콕의 말은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수많은 영화의 역사들이 이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어왔다. 결론적으로는 각색의 문제다. 물론 후발 주자인 영화가 같은 식의 진행으로 원작을 넘어서기에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 어차피 (훌륭한, 혹은 어떤 매력을 가진) 원작을 보고 같은 방향으로 진행한다면, 그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원작의 테두리 안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원작을 가진) 영화들을 보면 그 영화는 원작과는 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주제 사라마구 ' 넘어서기

 

 

  일단 소설은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다. '주제 사라마구' 가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여서가 아니다. 읽기 시작하면 손에 땀을 쥐면서 그 참혹한 장면 묘사들을 눈살 찌푸리면서도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지옥을 느끼기에 이만한 소설이 없고, 보고나서 이 전체가 굉장한 우화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번 더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최대 강점은 스타일이다. 추상화된 인물과 배경, 문장부호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마침표만 있어서 읽다보면 그 자체가 혼란인 문체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 전반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강렬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이는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성공 여부는 한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과연 어떻게 소설의 스타일을 영상으로 표현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스타일을 대체할 영화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할 것인가?




             

 

 

영화화의 포인트, 시각화와 감정이입

 

 

 

 

  엄청난 규모를 시각적으로 표현 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는 할 만큼은 했다고 말 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스케일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낸 영화의 장면들이 장관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표현해낸 감독의 연출력은 압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시각화’를 하는 바람에 결정적으로 원작의 추상적인 인물과 배경이 사라져버렸다. 작품의 추상적인 설정들은, 시각화 되어버리는 순간 구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가 이러한 구체성의 예술이라면, 연출자는 당연하게 다른 스타일을 창조해야만 했지만(역설적으로 그것이 원작의 리얼리티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길이기도 하다), 영화는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기에도 벅차 보인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원작에서보다 훨씬 감정에 호소하는 장면들이 많다. 일단 가지치기를 하다보니 주인공 의사아내의 비중이 훨씬 커져 관객은 의사아내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자주 등장하는 '줄리안 무어'이 홀로 벽에 기대어 고뇌하는 미장센이 이 감정을 대변한다.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감상적이고 교훈적인 나레이션들, 음악, 무엇보다 격리시설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과잉되었다.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묘사 때문에 상황의 잔혹성은 훨씬 줄어들었다.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려다 보니 격리시설 내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특히 성상납 장면에서의 폭력성은 극한에 다다른 인간을 보여주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결국은 감독이 가장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했던 부분, 유일한 ‘보이는 자’인 의사아내의 고통도 '어지러진 집을 치우는 가정주부의 고통' 정도로 떨어진 것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혼돈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원작에서 사용된 문장부호의 생략은 영화적 언어로 승화되지 못한 채, 영화 속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영화는 훌륭한 원작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그것을 따라가는데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껍데기만이 남은 영화가 되어버렸다. 영화 내에서는 눈을 감고 내면을 느꼈다고 말하면서, 실은 눈을 뜨고 각색해서 원작의 깊이감을 받아들이지 조차 못했다. 그래서 우화적인 원작의 본질, ‘상상을 통해 극대화되는 공포, 처절한 현실인식’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재난영화만이 남았다.

 

 

 


 

 

인간 안으로부터 시작된 재난

 

 

 

  그간의 재난영화들이 자연재해나 외계인의 침공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눈먼 자들의 도시>는 재난의 근원을 철저히 인간 안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알아내는 순간 이 영화가 얼마나 '인류애'적인 영화인지 깨닫게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인간들은 '시력'보다 더 큰 것을 잃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신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접어두자. 어차피 예수, 성모 마리아도 앞 못 보는 장님이다(영화 참조).

  이 영화는 초반부터 철저하게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보는 관객조차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믿기 힘들 정도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믿음을 잃은 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얼마나 몰락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 재난에 빠진 인간들은 한 곳에 모이게 된다. 타자에 대한 믿음을 잃은 인간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이용한다. 오직 자신만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좀 더 철저히 기댈 수 있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제 3병동의 왕(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총이 있었고 그는 그 총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오직 그 자신만 보호한 결과는 영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제 3병동의 왕을 비롯한 믿음을 잃은 이들을 벌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믿음' 또한 매우 인류애적인 가치다. 그것을 잃은 인간 또한 '삶의 의지'를 잃은 인간만큼이나 철저하게 몰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 인가? 생존자 일행들을 잘 살펴보면. 그들은 병동에서부터, 병동에서 탈출하고부터 이들은 서로를 굳건히 의지하게 된다. 마치 대안적 가족의 형태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그러한 의지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병동에서 고난을 겪으며 얼마나 서로에게 믿음을 갖게 됐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시력'이 허락된다. '타자에 대한 믿음'으로 지옥에서 생존한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될 것이다.

 

 

 


 

 

 

 해답은 당신안에 있다

 

   

 

  이 영화가 호평보다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높았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소설을 영상문화로 새롭게 구현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소설의 충실한 재현에 그쳤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압축본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교차로에서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이세야 유스케), 그를 도와주면서 차를 도둑질한 남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키무라 요시노), 안과 의사(마크 러팔로), 간호사 및 진료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 영화의 묘사는 소설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으며, 심지어 눈이 먼 순서라든가 그들의 에피소드도 거의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묻는다. “왜 출발하지 않죠?” “아직 신호가 바뀌지 않아서요”

  모두 눈이 먼 사회에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목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안과의사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으며, 따라서 타인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서 보게 된다. 그게 과연 행운일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점차 이성을 상실해가고 이성이 배제된 인간의 본성은 한 편의 지옥도를 만들어 간다. 수용소는 쓰레기와 더러운 오물로 뒤덮이고, 그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 힘과 무기로 권력을 장악하고는 식량배급을 이유로 재물과 성을 강탈하는 무리들. 수용소를 벗어난 안과 의사의 눈에 비치는 도시는 이미 거대한 쓰레기장에 불과하고 굶주린 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으며 살아간다. 물론 지옥이라도 악(惡)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어깨를 잡고 서로에게 지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시체 대신 눈물을 닦아 주는 개, 죽은 여인의 몸을 정성껏 닦아주는 여인들.

  소설에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이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이며, 이들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히스패닉인지, 동양인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눈이 먼 사회에서 이러한 구분은 필요가 없으며, 지구의 어떤 곳이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화에서도 이들의 외모를 제외한다면 소설처럼 별다른 언급이 없긴 하다. 그러니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아내를 일본인으로,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을 흑인으로, 장관을 아시아계로 설정한 것은 소설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정해야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상상력을 발휘한 지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그래도 워낙 원작이 좋으니깐 기본은 한다. 다만,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실명한 자들과 보균자들과의 격렬한 대립이라든가 안과 의사의 아내가 거리에서 목격한 살벌한 풍경들이 좀 더 과감하게 담겼으면 어땠을까 싶다.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풍경에 비하면 수용소나 거리의 모습은 좀 더 완화된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두 번에 걸친 내레이션은 더욱 이를 부채질 했다.

  소설에서도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영화도 사람들이 왜 실명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 영화의 단점으로 꼽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실명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하는 과정은 영화 <해프닝>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해프닝>에서 주인공은 “설명하기 힘든 자연현상인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끝이 나는 경우가 있다”며 영화의 결말을 알려준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그 모든 악몽은 별다른 예측 없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소설 또는 영화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관객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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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힘줄

강  정/ 키스

 intheatre 

 

 

 

시적힘줄

 

 

시에도 힘줄이 있나보다. 강정의 시를 읽으면 남성의, 그리고 야생동물의 거친 힘줄이 떠오른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실내에서 잘 관리한 세련된 무엇이 아니다. 거친 들판에서 햇빛을 받아 단단해진 구리빛 몸. 그 몸의 껍데기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 힘줄이다. 힘줄은 피부 아래, 혈관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어떤 내면적 힘의 원천이다. 그것은 피와는 또 다른 무엇이다. 말하자면 피보다 더 질기고 단단하고 억척스런 생명의 뿌리다. 힘줄은 질기다. 그 질긴 힘으로 온 몸의 압력을 홀로 지탱하고 있다. 강정의 시는 힘줄이다. 그의 시는 질기며, 거칠며, 언제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고 그의 시는 그 질긴 근성으로 ‘살아가는 것’의 압력들을 지탱하고 있다. 거대한 고래와 사투를 벌이는 어부의 힘줄처럼, 그는 ‘생명’의 거대한 아픔을 지탱하고 있다. 시인 강정에게 산다는 것, 그의 시에 흐르고 있는 과도한 ‘생명력’의 실체는 무엇인가?

 

 

 

 

 

 

짝짝 신의 볼기를 치듯 허공을 굴착하던 투전꾼들의 폭언이 내 몸 깊숙이 박혀있다

남들이 써놓은 문장에 화들짝 놀랄 때마다

그때의 뜨겁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몸을 훑어 내린다

내 음성에 배인 빙초산 냄새를

가끔 사랑으로 의역하던 이들 앞에서

네발로 기며 쏟아냈던 불덩이는

그때 벌어진 상처를 열고 숨어든 눈먼 짐승 의 울음이었다

 

-「달빛을 받는 체위」中

 

 

 

 

 

 

 

그가 끊임없이 생명력을 탐하면서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근원적 아픔을 답습하는 지 이 시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내면적, 존재론적 아픔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내면의 상처, 개인적 인생의 아픔에서 오는 현실과의 부조화 문제가 첫 번째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런 개인적, 내면적, 프로이트적 잠제의식, 환경적이 아닌 그저 산다는 것의 허무, 산다는 것의 무의미함, 그 존재 자체에서 오는 고통이다. 이 첫 번째 아픔과 두 번째 아픔의 교집합에서 시인 강정이 말하는 ‘키스’가 탄생된다. 시인 강정이 말하는 사랑은 절대 감각적인 사랑이 아니다. 그의 사랑은 ‘내 음성에 배인 빙초산 냄새’이다. 그것은 바닷가 부두에서 달빛을 받으며 놀음하는 어부들의 삶에서 기인한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 거친 인생 앞에서, 바다라는 거대한 망망대해를 떠도는 어떤 인생의 무서운 환경아래서 시인은 ‘그때 벌어진 상처를 열고 숨어든 눈먼 짐승의 울음’을 쏟아낸다. 이것은 사랑의 따뜻한 고백이 아닌 ‘네발로 기며 쏟아내는’ 짐승의 불덩이이다.

이처럼 그에게 사랑의 고백은 울부짖음이다.

 

 

 

 

 

 

 

고통의 넘나듬, 그것이 ‘키스’다

 

 

 

나는 네게서 아름다운 유방의 원형과 심리 적 근친상간의 전형성을 확인하려 든다...살짝 혀를 빼는 순간, 내 혓바닥에 어느 불우한 가 족사가 크로키로 그려져 있다「키스」中

 

 

결국, 그의 키스는 남녀간의 연애를 뛰어넘는 종족간의 번식이며, 음울한 환경의 넘나듬이며 그 고통의 농밀한 나눔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시의 매력이 탄생한다. 그의 시가 지극히 개인적인 아픔을 말하고 있으나 그의 시가 보편적 매력을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랑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그가 시를 통해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랄하고, 깜찍하고, 귀여운 사랑. CF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이미 만들어진 사랑의 식상함 앞에서 시인이 보여주는 힘줄의 거친 사랑은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인스탄트의 사랑, 아무 의미없는 껍데기뿐인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이다. 그런데 그 나머지 반쪽을 채울 뜨거운 힘줄을 강정은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랑은 그저 번듯한 오락이 아니다. 아픔의 교감이며, 상처의 넘나듬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은 이렇게 색다르고 어쩌면 진실되다.

 

 

 

 

 

 

 

관념어의 주술

 

 

그의 시는 투박하다. 시적인 비유가 감각적이지 못하다. 시집 전체에서 몇몇 감각적인 시어가 있지만 그의 시는 전체적으로 투박하다. 이 투박함이 어디서 기인하는가 하면 그의 느슨한 관념어에서 온다.

 

 

심장에서 솟구치는 애액들이 식도를 달 군다

먹은 걸 토하다 보면 머릿속에 달이 떠 오르기도 한다

새벽 길가 하수구 수챗구멍에 고개 박 은 채 구토하던 남자를 향했던

강간충동이 나의 진짜 욕망이었다

-「달빛을 받는 체위」中

 

 

 

 

 

심장에서 솟구치는 애액들이 식도달군다’ 라는 문장이 대표적이다. ‘심장, 솟구치는, 애액, 식도, 달군다......’ 이 정도로 한 문장 안에서 비슷한 관념어들을 쏟아내는 것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쏟아냄이며 어떤 관점에서는 느슨함이다. 강정의 시는 전체적으로 이렇게 비슷한 느낌의 시어를 한 문장 안에서 마구 쏟아낸다. 이러한 비슷한 느낌의 관념어가 그의 시에는 너무 많다. 남성적이고 거칠고, 즉물적이나 그것이 너무 과도하게 쏟아진다. 그러나 강정은 이 쏟아짐을 하나의 즉물성으로 그의 시적 스타일로 확립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랩과 같은 시적언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슬랭과 욕설이 여과없이 쏟아지는 것, 그러나 이 상투적이고 즉물적인 쏟아짐은 그의 시적 구조력 안에서 빛을 발한다. 그 다음 행에, 시인이 관념어를 잘 이해하고 있음이, 그래서 그가 시적 구조력을 갖춘 시인임이 잘 나타난다.

 

 

 

 

‘먹은 걸 토하다 보면 머릿속에 달이 떠 오르기도 한다’

‘새벽 길가 하수구 수책구멍에 고개 박 은 채 구토하던 남자를 향했던 강간충동이 나의 진짜 욕망이 이었다‘

 

 

 

 

 

아래 문장에선 관념어가 아닌 구체적 행동속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달이라는 시어를 통해 공간을 창조한다. 그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달빛 아래 구토하는 남자’라는 상황이 있기에 앞서 구토했던 관념어의 쏟아짐들이 충분히 공간적으로 구조를 갖춘다. ‘심장에서 솟구치는 애액들이 식도를 달군다’ (A), ‘먹은 걸 토하다 보면 머릿속에 달이 떠오르기도 한다’ (B), ‘새벽 길가 하수구 수책구멍에 고개 박은 채 구토하던 남자를 향했던 강간충동이 나의 진짜 욕망이었다‘(C)라고 할 때, A에서 마구 쏟아진 관념어는 뜨거움과 격렬함이라는 이미지를 성취하고 B에 이르러 디테일한 상황과 공간위에서 그 모호함을 벗는다. 결국 시인의 모든 힘이 모아지는, 그래서 시적 미학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C인데, 시인은 C에서 ’구토하는 남자를 향한 강간충동‘이라는 상황의 역설, 또는 역겹게 비틈으로 그의 내면의 구토, 그리고 역겨운 욕망의 근원성을 구조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즉, 그는 매우 무책임하고 거친 랩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거침 속에 탄탄한 전략을 숨길 줄 아는 전략적인 시인이며, 뛰어난 관념어의 주술사이다.

 

 

 

 

 

 

시인의 말을 빌어 다시 한번 그의 시를 정의한다.

 

 

 

 

 

 

 

 

‘그러니까 이 키스는 약물중독과 무관한 고도의 유희와 엄밀성의 접촉이다’「키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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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또는 상실의 구조화

'Fatherlessness' (체홉의 플라토노프)

 

 

 

by   intheatre 

 

 

1920년. 체홉이 죽은지 16년이 지난 어느 날, 체홉의 미발표작 한 편이 뒤늦게 공개되었다. 그가 십대일 때 쓴 미완성작 플라토노프는 제작시기 상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냐 아저씨>나 <벚꽃동산>, <세자매>, <갈매기>등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후에 나타날 걸작들의 '아버지'인 셈이다. 그런데 기록으로 남겨진 이 희곡에 대한 단서는 체홉의 편지에 기록된 'Fatherlessnss'라는 짧은 문장이 전부이다. 말하자면 '부성의 부재, 즉 아버지 없음'이다. 이것은 은유적이다. 다른 장막극들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이자 미완성된 채 발표조차 하지 않았던 작품이 이후에 발표된 어떤 작품과도 비견될 현대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은유이다. 세상에 눈 떠나가는 젊은 작가가 직감적으로 느낀 세상은 그렇게 상실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후 작품들에서 나타날 뜨레쁠레프의 방황도, 바냐의 자기혐오도 이 플라토노프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유리 코르돈스키 연출로 소개된 <플라토노프>는 체홉의 이 작품들에서 부조리성을 읽어내 작품 속 '없음과 상실'의 의미들을 구조화하고 있다. 이 공연에는 없음과 상실에 대한 연극적 기표들이 넘쳐난다. 러시아 연출가 코르돈스키는 흔히 <플라토노프>로 일컬어지는 체홉의 초기 미완성작에다 아버지상실 'Fatherlessnss'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를 다시 '난파된 배'라는 무대 언어로 번역해 냈다. 말하자면 이 플라토노프는 '없음과 상실'을 통해 현대사회를 은유하는 한 편의 시적 은유이자 연극적 구조화인 것이다.

 

 

 

 

 

 

무대 위에 가득 펼쳐진 '없음과 상실'의 기표들

 

 

 

긴 적막. 그리고 빛들의 흩날림. 사람들 손엔 폭죽이 들려있다. 폭죽의 빛은 무대 밖의 짙은 어둠과 대비된다. 폭죽놀이로 한껏 고무된 이들의 여흥은 여유있고 낭만적인 삶을 전경화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즐거운 축제엔 무언가 어두운 대비가 있다. 무대 뒤로 세워진 판자들, 객석에까지 연결된 줄 등은 이 공간이 실제 공간을 일차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닌 상징적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공간은 무언가 현실과 괴리된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둠은 그렇게 내리고, 연극은 시작된다.

 

 

이 극은 부재, 즉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영원한 맹세도, 성실함도, 용기도 모두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무의미한 욕망뿐이다. 인생의 목표가 사라진 이들 뒤로 깊게 이어진 어두움은 이들이 고독과 절망을 견디며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무대는 난파선이다. 밧줄로 꽁꽁 묶여있는 통나무 배, 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존재, 변화와 욕망을 지향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어쩌면 할 수 없는 이들의 내적 갈등, 한 곳에 영원히 붙들려있으면서도 움직이고 있다는 환상을 상징한다. 주인공들은 이 난파선을 타고 어딘가 안식의 세계로 향하고자 한다. 어디엔가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으나 그 곳은 실제하지 않는 망상의 공간이다. 통나무로 엮어 만든 나룻배와 나무기둥, 밧줄, 몇 개의 의자들로 무질서하게 채워지는 무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불안과 파편화된 심리를 그려낸다. 주변과 격리된 나룻배 안에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타인에 대한 경계와 공격성을 늦추지 않는 인물들이 표류하고 있다. 이들은 꼬냑과 담배, 소소한 놀이들로 시간을 보내고 복잡한 이성관계를 일삼으며 자신들만의 궤변으로 대화를 채워나간다. 그들은 사랑할 수도 또 사랑받을 수도 없는 자신 속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다.

 

 

 

 

 

 

 

 

 

 

아버지의 상실, 난파된 배에 함께 올라서다

 

 

특히 이 난파된 배는 무대 깊숙한 곳에서 객석 바로 앞까지 나와있다. 반파된 배의 뱃머리는 무대 안쪽을 향하고 있기에 이로써 표류한 배, 부유하는 배에 올라탄 것은 비단 배우들뿐만이 아닌 셈이 된다. 이처럼 객석에까지 그 의미가 확대된 무대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플라토노프>의 나룻배에 승선함으로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들은 무대 밖 나룻배의 나머지 반쪽에 위치함으로써 무대라는 거울을 보게 된다. 무대라는 거울을 통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아버지가 상실된' 시대의 황폐한 풍경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상실이라 함은 이 세계에서 기존의 체계, 법, 권력, 혹은 진리, 근원과 같은 절대적인 권위, 수직적 질서 등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보면 극중 인물들은 '아버지가 상실된'공간, 다시 말해 절대적인 가치가 의미를 잃어버린 공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꼬냑을 가득 채운 술잔으로 장기를 두거나, 복잡한 이성관계를 맺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식으로 무의미하게 삶을 연장해가며 끊임없이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극중 인물들이 불꽃놀이를 하다 하릴없이 텅텅 빈 양철통에 불꽃을 터뜨린다든지, 악기를 연주하기 보단 밧줄에 걸어둔다는지 하는 행위들은 근원적 가치를 상실한 시대에 느끼는 공허함을 연극적 상징으로 풀어낸 것들로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아버지 세계의 부정은 특히 아버지 없는 인물이자 이 극의 주인공인 플라토노프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가시화된다. 극중 내낸 플라토노프는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병, 죽음, 채권자들, 소유지 매각 등 온갖 문제에 둘러써여 있었으면서도 존경받는 것처럼 죽은 아버지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맹렬하게 비난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플라토노프에겐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9년 전인지, 10년 전인지 플라토노프는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이처럼 아비 없는 자식 플라토노프는 전통적 가치에 대해 반감이 가득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에 거절당해 온 세대들이 이제는 역으로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는 오늘날 현실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토노프 외에도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부정하는 인물로는 글라골리예프 2세를 들 수 있다. 그는 파리 여행 중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의자를 던지는 등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데 여기서 아버지는 권위를 상실한 채 돈으라는 한낱 물질적 가치와 등가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장군부인에 대한 혐오스런 반응으로도 잘 나타나있다.

 

 

 

 

이처럼 온갖 종류의 권위가 상실된 시대에는 사람들의 욕망은 갈 곳을 잃고 떠돌게 된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치들이 힘을 잃자 그들의 욕망이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것이다. <플라토노프>에서 이 떠돌이 주체들은 욕망의 대상이자 목적을 찾아 나서는데 이런 경향은 특히 플라토노프의 여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인들은 플라토노프를 이상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러나 이런 이상과 목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극중 축제가 끝나고 2막으로 전환되는 분위기는 이러한 몰락을 전경화한다. 1막 마지막 부분에서 노란색에서 차가운 색으로 바뀐 조명과 함께 나지막이 들려오는 현 음악은 플라토노프 식의 즐거운 축제가 이제 막을 내리고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을 것임을 알린다. 2막이 시작되면서 무대 위 애초에 바르게 놓여져 있던 의자들은 다리가 하늘을 향하게 뒤집어 놓여진다. 수직으로 세워져 있던 기둥들도 이제 서로 엇갈린 채 쓰러진다. 이처럼 무대장치는 보다 구체적으로 세계의 황폐함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플라토노프에게 점점 더 지나치게 몰두하며 자신의 욕망을 끈질기게 투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진한 처녀 그레코바는 플라토노프에게 "당신이 원하는 바를 나와 함께하자"고 하고, 부인인 샤사는 플라토노프가 그녀를 고작 유모로 취급하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라고 되물으며 고리타분한 사랑을 고수한다. 가장 현실적인 여자로 그려지는 장군의 미망인 안나까지도 종국엔 자신을 유혹하라고 플라토노프를 꼬드기는데, 플로토노프의 거절에 그녀는 술에 취해 "배운 것 없는 여자, 정해진 일이 없는 여자"라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욕망의 기표를 잃어버린 잉여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특히 소피아의 경우에 극에 달한다. 플라토노프로부터 함께 도망가자는 구체적 약속까지 받았던 소피아는 플라토노프의 배신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소피아는 플라토노프와 함께라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그녀는 플라토노프의 마음을 돌려보려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긴 머리칼로 그의 발을 훔쳐내며 자신을 구해달라 애걸하지만 결국 거절당한다. 쏘냐의 배신감은 천식환자처럼 숨을 거칠게 내쉬는 모습에서부터 남편 보이니체프의 총으로 플라토노프의 머리를 겨누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점차 극대화된다. 마침내 욕망은 샴페인의 기포마냥 부글부글 끓다 결국 플라토느프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플라토노프의 죽음 이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까? 의사 트릴레치는 '죽은 자들은 파묻어버리고, 산 자들을 수리해야지!'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트릴레치의 말을 뒤로 하고 사람들이 플라토노프를 묻으러 무대 밖으로 나간 사이 무더운 날씨 속에 압력이 높아진 샴페인이 폭발하면서 이 공연은 막을 내린다. 무대 위 샴페인의 폭발은 켜켜이 쌓인 채 해소되지 못한 욕망의 대분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한낱 거품에 불과했던 플라토노프적 인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플라토노프>의 인물들은 방황하고 헤멜 것이지만 절대 그들이 구원받지도 못할 것을 연상시킨다.

 

 

 


 

 

 

 

 

 

행동 할 수 없는 그들, 그들에게 구원은 있는가?

 

 

 

 

우리 인생이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바꾸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 플라토노프는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더 중요한 일을 할 수도 있었던, 그러나 시골에 쳐박혀 평범하다 못해 한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이다. 그런데 체홉이 만들어낸 이 일련의 인물 군들 중 가장 먼저 이름을 등재시킨, 즉 모든 인물들의 아버지이자 원형인 플라토노프는, 총으로 쏴 죽이기는 커녕 덜컥 총을 맞고 죽기까지 한다. 참으로 허망하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는 것이 사실 우리네 삶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무대에 오른 <플라토노프>의 연출가 유리 코르돈스키는 "나는 아버지 세대를 원망하며, 그들의 부덕함 때문에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에 관심을 가졌다. 삶의 뿌리를 상실한 세대, 이전 세대와의 연계점을 잃어버린 고아, 사생아들이 내 작품의 주인공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원작의 대사를 과감하게 덜어버린 공연 대본에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은 부자들 간의 관계이다. 코르돈스키는 원작에서 특히 부자들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무대에서 모든 아들들은 분노하고 방황하는데, 그들의 방탕함과 악덕은 부모세대로부터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부모세대가 물려준 것은 저급한 욕망, 속악한 흥정,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계략이거나, 경제적 부채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들들이 왜 그렇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오만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왜 그렇게 쉽게 주저앉아 버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모순은 바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정체성과 정신적 부박함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고자 왜곡된 자부심을 내세워야하는 그 혼란스러운 존재론적 조건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연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1막에서 관객은 참으로 혼란스럽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니체프 장군의 미망인의 연회를 찾아온 손님들은 흔들리는 땟목 위에서 열정적으로 떠들고 먹고 마시며 철학을 논하고 재능을 논하고 이상을 논한다. 그러나 그 모든 소동의 의미를 관객은 도통 파악할 길이 없다. 이 상황에서 겨우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친족관계나 친분관계 정도이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듯 에너지를 뿜어대지만, 여러 겹의 밧줄로 묶인 땟목이 한 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다들 제자리에서 소동을 피울 뿐이다.

 

 

 

그 지루한 시간들의 의미를 관객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은 인물 개개인의 감춰진 면면이 하나씩 정리되고 파악되는 2막에 와서이다. 사랑이나 호감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계산과 장삿속에 불과했고, 이상이며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객기이거나 달밤의 열정에 불과했다. 가면이 벗겨진 현실은 술병이 구르고 먹다 남은 빵 접시가 뒹굴고 천식으로 꺽꺽대며 호흡곤란을 일으키거나 숙취로 어지러운 것이다. 그렇게 황홀하게 도취된 1막과 그곳에서 깨어난 2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이다. 항상 사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아니라 뒤늦게 깨닫기 마련인 바로 우리네 삶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삶에서 애써 벗어나지 않는 것이 탈출을 원치 않아서는 아니다. 우리들, 우리 모든 플라토노프들은 탈출을 원하지만 그저 행동할 수 없을 뿐이다. 그저 누군가가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란다. 여자들은 플라토노프에게, 플라토노프는 여자들에게. 결국 우리는 밧줄로 묶인 땟목일 뿐인 것이다. 그런 삶을 드디어 마감하게 된 플라토노프의 최후에 샴페인이 팡팡 터진다는 것은 참으로 은유적이다.

 

 

 

 

구원 없음을 통한 부조리적 세계관

 

 

 

 

결국 이러한 모든 설정들은 작품의 부조리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상실과 부재의 주제는 결국 부조리의 주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플라타노프가 사유하고 있는 '없음, 부유하고 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연출자의 의도였기에 연출자는 왜 삶이 지루한지를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부조리성은 여기서 잉태된다. 연출자는 부조리성에 초점을 맞춰 '없음'과 '상실'을 현대인의 존재와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작품의 모든 지점이 구원의 문제로 집약되는 가장 강렬한 메타포는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는 장면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론 성경에서 여인이 향유옥합을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가락을 씻어주는 장면을 연상케한다. 또한 마라/사드에서 코데이가 머리카락으로 내리치는 장면도 연상케한다. 플라토노프를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단초는 결국,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자로 플라토노프를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가? 이 여자들은 진정 자기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으나 그 사랑을 플라토노프에게서 찾을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 연극은 '허무주의'가 '실존'을 억누르는 해가 뜨지 않는 밤의 연극인 셈이다. 근원을 상실한, 이성과 의미를 상실한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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