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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들의 진혼곡으로 풀어나간 '햄릿의 꿈'비평하다... 2011. 3. 4. 19:07
광대들의 진혼곡으로 풀어나간 햄릿의 꿈
-노래하듯이 햄릿
intheatre
연극이 혁명을 꿈꾸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을까? 연극이 위기를 감지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을까?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미래를 밝히는 시선이 연극이라고 믿는다면, 변화를 노래하고 새로움을 욕망하는 것은 연극예술의 본질이다. 그럼에도 최근 젊은 연극인들의 활약은 특별히 오감을 자극한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우리 연극이, 언어가, 문법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최근 연극계를 들썩이게 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연극인들의 시도를 하나의 특징으로 묶거나 어떤 흐름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 작업의 본질에 대한 오해가 될 것이다. 그들의 특징은 작업의 다양성, 정의되지 않고자 하는 끊임없는 변화에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밤의 꿈>, <연緣 카르마> 등을 통해 역동적인 움직임, 전통적 리듬감, 이미지로서의 연극언어를 보여주는 양정웅과 극단 여행자, <햄릿>과 <귀환> 등을 통해 문화와 정서를 초월한 보편적 공연언어, 소우주로서의 몸의 언어를 탐구해나가는 원영오와 극단 노뜰, <흉가에 볕들어라>, <지리다도파도파 설공찬전> 등을 통해 새로운 지점에서 문학언어와 내러티브에 다시 무게를 찾아주는 이해제와 극단 신기루 만화경 등, 오늘의 젊은 연극은 한 지점에서 시작되지도, 한 방향을 향하지도 않는다.
물론 그들의 연극이 하늘 아래 새로 솟은 것도 아니요, 역사 이래 처음 쓰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장점은 연극언어가 배우의 언어요, 공간의 언어라는, 선배들이 반복해서 강조해 온 “오랜 진리”에 충실하다는 것에 있다. 그들은 몸을 움직여 리듬과 의미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빈 공간을 완전히 새로운 시공으로 창조한다. 그들은 자신이 동인動因이 되어 관객을 움직이고 상상하도록 하는 것이 연극임을 안다. 그들은 막이 오르자마자 성급하게 제시되는 권위적인 언어나 고정된 의미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극의 의미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극 안에서 생성되고 발전되고 찾아지는 것임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경향아래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로 이현주, 배요섭의 극단 뛰다를 들 수 있다. 그들은 <하륵 이야기>, <상자 속 한여름밤의 꿈>을 통해 이미 지속적으로 인형과 오브제, 나아가 무대와 공연을 둘러싼 환경에 새로운 연극적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일관되게 해오고 있다. 그들의 대표작 <노래하듯이 햄릿>을 통해 그들의 연극언어가 어떻게 무대화되었는지 살펴보자.
1.
무대 위로 조명이 밝아오면, 제일 먼저 무대 앞의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무대는 잔잔한 조명을 받으며 호수 속에서 흔들린다. 햄릿의 고뇌, 그의 내면 속 흔들림일까. 무대 위엔 높은 언덕이 하나있고 그 뒤로 솟대처럼 나무들이 듬성듬성 꽂혀있다. 퇴색된 땅의 황량함과 그위에 이리저리 뒹구는 가면이며 해골등이 어스름한 저녁녘 질감과 어울려 이곳이 무덤지기들의 놀이터임을 암시해준다. 호숫가 물결위에 자기 얼굴을 바라보는 햄릿의 시선이 느껴질때쯤, 무대 왼편에서 흥겨운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노래하듯이 햄릿>에서 관객이 먼저 만나게 되는 이는 햄릿이 아니다. 눈물이 번진 기묘한 분장, 누덕누덕 기운 잿빛 옷을 입은 광대 4명은 수레를 끌고 들어오며 ‘낯선 햄릿’을 시작한다. 그들은 죽은 영혼을 인도해주는 진혼곡을 한바탕 흥겹게 불러제끼고 난뒤 관위에 걸터앉아 햄릿의 수첩 속 첫 대사를 읽으며 본격적으로 햄릿의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때로는 로맨틱한 대사를 남긴 햄릿을 조롱하기도 하고, 때로는 숙부와 거트루트에 대해 격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오필리어와의 사랑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그들은 햄릿의 스토리에서 선택된 이야기들을 한바탕 흥겨운 놀이로 풀어놓는다. 이렇게 무덤지기 광대의 구조와 햄릿의 서사적 구조가 겹치면서 작품은 햄릿이 가지고 있는 비극적 의미를 광대들의 놀음으로 희화화한다. 광대들의 익살로 풀어진 햄릿은 햄릿 서사 구조의 타자화라는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기존 작품이 햄릿의 젊고 혈기 넘치는 모습에 주목하는 것과는 다르다. 광대들이 종이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햄릿의 이야기를 펼침으로써 관객과 햄릿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에 슬퍼하고, 아버지를 죽인 숙부, 그와 결혼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분개하고 고뇌한다. 한편으론 오필리아를 향한 사랑을 품고 있다. 이런 햄릿의 조각 난 내면은 광대들의 연기와 노래로 적절하게 외면화된다. 광대들이 걸쭉한 입담으로 햄릿의 행동을 평하고, 인형을 들거나 얼굴에 가면을 붙인 채 적당히 거리를 조절하는 사이 관객은 ‘너무 생각이 많은’ 햄릿을 덤덤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를 기억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죽음도 괜찮은 것일까,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무엇을 남기는 걸까. 광대들이 끌어가는 <노래하듯이, 햄릿>은 이처럼 무거운 질문을 던지면서도 경쾌하고 냉소적인 어조를 잃지 않는다.
2.
연출자 배요섭이 무거운 이야기를 광대의 익살 속에서 푸는 것은 진혼굿의 형식을 취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주제가 죽음과 삶을 화해시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뛰다’가 제시하는 화해의 방식은, 죽음 속에서 삶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것이다. 다시말해, 타인 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다. 기억을 통한 죽음의 극복이 ‘뛰다’가 파악하는 『햄릿』의 주제이며, 때문에 이들은 이를 <노래하듯 햄릿>의 테마음악으로 삼는다.
수첩을 열어 “오필리어, 나 죽더라도 날 기억해줘 나도 널 영원히 잊지 않을게”라는 구절을 읽는 첫 장면의 음악에서부터, 그리고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날 위해 울어주세요.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게”라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테마 음악이 반복된다. 작품 속엔 죽음을 삶의 일부처럼 그냥 받아들이라는 메시지가 자주 나온다. 인간의 사고가 갈 수 있는 극단까지 자신을 몰고갔던 햄릿, 본 연극은 스스로를 분열시키고 치열하게 번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비극적인 죽음에 이르는 그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려는 것이다. 물론 슬픈 일이지만 죽음으로 이제는 다 끝났다. 다 되었다. 죽어서 까지 무겁게 지상에 가라앉아 있지 말고 좀 웃기도 하면서 밝은 빛을 따라 하늘로 가거라.....라는 위령제이다.
슬픔을 그대로 놓아두면 삶이 무거워진다. 본작은 슬픔을 손상시키지는 않되 짓눌려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햄릿이라는 작품 자체가 가진 묵직함을 덜어주고 희극의 균형추를 달아줌으로서 슬퍼도 견딜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장미 어린 선율의 첼로와 피아노에 곡을 쳐지지 않게 해주는 퍼쿠션과 드럼연주가 이를 크게 도왔다. 광대가 극을 진행시키고 인형극을 사용함으로써 현실을 패러디 하는데에 적절한 포맷을 갖추었다.
3.
작품에는 종이로 만든 가면과 인형, 붉은 천 등 다양하고 독창적인 오브제가 사용된다. 첼로와 피아노로 연주되는 28곡의 음악은 불협화음과 화음이 적절히 어우러져 아련한 슬픔과 서정성을 자아낸다. 무엇보다도 햄릿의 인형이 인상적이었는데, 뭉크의 절규 속 인물처럼 눈물을 흘리는 듯 고뇌하는 표정이 햄릿의 특질을 잘 표상하였다. 뿐만 아니라 긴 천을 활용하여 몸체를 나타내는 인형놀림을 통하여, 사유하는 햄릿을 적절히 시각화하였다. 거트루드나 클로디어스의 가면도 흥미로웠으며, 다양한 소품과 무대 위에서의 장치변환도 재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공연의 가장 큰 미덕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소품들이 광대들의 손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 것이다. 해골 같은 햄릿의 얼굴에 나뭇가지를 갖다 대면 소심한 존재가 되고, 검은 우산을 갖다 대면 성난 고슴도치가 되고, 천은 그의 행동과 기분에 따라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햄릿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그 외에도 죽음을 연상케 하는 관에서 나온 죽은 오필리어는 냄비에 흰실을 늘어뜨리면서 솟아오르는데 음악 효과와 함께 유령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무대 뒤켠에 장승처럼 나란히 서 있던 클로디어스와 거투루드는 어느 순간 생명을 얻어 무대를 압도하면서 그들의 권력욕과 탐욕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하였다. 이처럼 천과 소품들을 이용한 포퍼먼스는 무대라는 공간과 시간적인 제약을 넘어서서 인물의 갈등과 상처의 깊이를 표현해내고 있으며, 햄릿 속 정신세계를 무대위에 외면화하는데 성공했다.
4.
배요섭은 연출가의 글에서 “가장 진실하게 다가오는 건 자살한 오필리아의 무덤을 파면서 농담을 나누는 무덤지기들 이야기”라고 밝혔다.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노래하듯이 햄릿>은 세계 곳곳에서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다른 이의 수많은 죽음을 접하며 ‘죽으나 사나 그게 그거처럼 생각되는 그들의 시선’으로 ‘햄릿’을 바라봤다. 이 작품이 의미를 남기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이 작품은 햄릿이라기 보다는 햄릿에 대한 이야기인데 관객들로 하여금 이 해석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했다는데 있다. 다시말해 원작에서 무덤지기들을 뽑아내서 그들의 이야기로 푼 극의 형식, 그리고 이 이야기를 다시 광대의 이야기로 일치시킨 설정이 가면과 소도구의 적절한 활용과 어울려 연출자는 일관되게 햄릿에 대한 이야기를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떤 강요나 제약 없이 풍성해지는 담론의 장에 자연스럽게 관객이 참여할 수 있다.
극단 뛰다는 햄릿의 꿈을 펼쳐 보여 준다. 네 명의 광대들은 <햄릿>의 모든 인물들을 투명하게 제 안에 받아들이고 그들을 대신해 사건을 재현해 준다. 동시에 광대들은 인물로부터 빠져나와 그들을 평가하고 사건을 논평하기도 한다. 사실 이 극의 재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노래하듯이, 햄릿>에서는 ‘햄릿’의 저 유명한 극중극 장면조차 여기에서는 방금 전 무대 위에 펼쳐졌던 재료들을 축소시켜 만든 패러디물이 되고 만다. 광대들은 햄릿에게 너무 고뇌하지 말라고 조롱한다. 비극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뱉어내는 절규 속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눈이 없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 비극성은 없다. 진지한 척 하는 모든 것을 조롱하는 광대들의 질펀한 입담과 노래만 귓가에 아련하게 남을 뿐. 그나마 그도 사라지고 나면 바람 소리 황량한 이승을 멋쩍게 바라보는 자신만 덩그러니 남게 된다. 고뇌에 찬 진지함은 조롱당하고 오히려 웃음을 유발시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우리가 기대하는 비극성은 여기에 없다. 햄릿이 어떻게 죽었는지, 거투루드와 클로디어스가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런 것은 이 연극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수많은 햄릿 이야기의 하나이듯, 이 연극 역시 그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재해석’이라는 수식어가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이것은 ‘극단 뛰다’의 햄릿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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