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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용기2017 새로운 포스팅!! (new) 2017. 5. 12. 20:36
진짜용기
'내 평범한 삶을 사랑하고, 품어주고, 이해하고, 특별함을 보는 용기'
지난 600여개의 포스트를 결론내는 글에 가까운 글을 쓴다.
결국
나는 그동안의 포스팅에서 진짜용기에 대해 말해왔다.
흔히들 용기는 맞써는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대상을 향한 용기로 생각하기도 쉽다.
또는 어떤 철학이나 어떤 경영학적인 도전이나, 또는 관습이나 사회적 부조리에 대한 저항을 용기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모든 용기들은 결국 대상 특정적으로 나타나는게 아니다.
대상 특정적인 용기라면, 결국 대상이 바뀌거나, 상황이 바뀌면 바뀌어버릴 용기이기에
진짜 용기있는 사람들은 대상을 따라가지 않는다.
일제시대 그 모진 고문을 받은 유관순의사.
그의 숭고한 용기는
절대로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환경에 대한 반응으로 발현된게 아니다.
유관순이라는 개인의 신념. 조국과 독립과 뿌리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강한 신념이 없었다면
그는 용기있게 맞써지 못했을 것이다.
내면의 용기가 외적인 저항으로 나타난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닐 것이다.
윤동주에 대해 그린 이준익 감독의 <동주>를 나는 인상깊게봤다.
동주는 자기자신에 대한 용기를 다룬 작품이다.
그것이 불타오르는 저항이나, 모진 고문을 이겨내는 강한 결과로 나타나진 못했지만
고뇌하고, 절망하고, 꿈꾸고,
결국. 부끄러워 할 수 있는
그것 또한
용기이다.
용기에는 큰 용기. 작은 용기의 구분이 없다.
그것은 비교가능한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스스로가 답할 수 있는 영역이다.
나는 얼마나 용기있는가?
그러므로 용기는
지극히 내재적인 개념이다.
나를 향한 용기가
진짜 용기이며
가장 시급히 가져야 될 용기 또한
나를 향한 용기이다.
그것은 촛불과도 같다.
올 대선을 상징하는 단어가 촛불인 것도 일맥상통하다.
촛불은
나를 향해 타오르는 것이다.
촛불은
나를 태워서야
주변을 비출 수 있는 것이다.
용기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비추기위한 용기는 있을수가 없다.
나를 태우는 것
그래서 결국 타오르는 불꽃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거대한 혁명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되는 것.
.
남을 이해하기 보다
나를 이해하는게 힘들다.
타인을 품어주는 것보다
나를 품어주는게 더 힘들다.
자기에겐 관대하지만 남에겐 냉정한 사람을 볼때
자기를 품어주는게 더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을 자세히보면 그건 자신을 품어주는게 아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건 자신을
회피하는 거다.
자기 스스로를 직시하지않고
회피할때
인간은
냉정해진다.
남의 작은 실수에도 분노하게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품어주는게 남을 품어주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 증명된다.
진짜용기는
나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오고 어디로가는지.
입시쟁이니까 또 입시와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나는 자소서를 지도해줄때
1번 성장배경과 자기소개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부분을 잘 모른다.
1번이 도대체 어떤 질문을 물어보고있는 항목인지 조차 모르는 것 같다.
입시를 다년간 지도한 내 경험으로 볼때
1번이 제일 중요하다.
1번은 단순히 자기자랑을 늘어놓는 항목이 아니다.
모든 예술과
모든 용기의 첫걸음인
나에 대한 이해.
나의 근원
나의 형성과정에 대해 소개하는
제일 중요한 필수항목이다.
나는 경상도 출신이며 부모님 모두 대구분이시다.
아버지는 두명의 대통령을 배출한 .... TK의 성지. 대구공고출신이시다.
보수의 성지가 내 뿌리인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 뿌리를 항상 거부하며 살아왔다.
대학진학때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대구를 벗어나고 싶었고
대구사람들을 벗어나고 싶었고
부모님을 벗어나고 싶었다.
무리하게 사업한다고 포항제철을 퇴사하고 낭만적으로 사업했다가 가족들에게 큰 고통을 줬던 아버지를 부인해왔고
결국 이혼하신 부모님들을 부정해왔다.
부모님들의 선택을 언제나 정죄했으며
나는 그 두분과는 전혀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나 세뇌해왔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절대로 그들처럼 살지 않겠다!
그러나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부모님과 점점 똑같아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볼때.
내가 그렇게 혐오하는 어머니의 어떤 기질이
내 가장 뚜렷한 기질로 나타나는 걸 볼때
소름이 돋는다.
고백컨데, 나는 나를 받아들이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내 환경, 내 뿌리, 내 가족, 내 외모, 내 기질, 내 연약함....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순서가 이게 옳은거 같다.
나를 먼저 이해하고
그 다음엔 받아들이고
그러니까 자소서를 쓸때
내가 누군지를 먼저 기록해보자.
내 환경, 내 성장배경, 내 유년시절, 부모님의 행동, 부모님의 영향...
이 모두를 기록해보자.
그리고 그 다음엔
나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은 얼마가 걸릴지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사람마다 다르지않을까?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35년정도는 걸린것 같다. 35세가 넘어서야 조금씩 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너는 제발 빨리 받아들이기를.
.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면
그 다음엔 품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
받아들이는 게 0 로의 회귀라면,
품어주고 사랑해주는건
가꿔가는 거다.
나의 내면을 살찌우는거다.
나를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방법론적인 조언을 경험에 비추어해보자면.
일단 나는 아이를 낳아본적이 없어서 이건 말할수가 없겠다.
주변 증언에 의하면. 자식을 낳는게 나를 이해하고 나를 품어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되는 것 같다.
한 생명을 낳고 키우다보면
왜그렇게 부모님들이 생각난다고 하는지?
신기하게도 딱 맞아떨어진다.
자기 자식을 키우면
자기 뿌리가 보이게 되고
자기 뿌리가 보이게 되니까
부모님이 생각나게 된다는거다.
참 신기하다.
성숙의 첫걸음이
뿌리찾기라는 것.
그래서 나는 고레에타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사랑하고 사랑한다.
결국
주인공의 아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결국 자기의 아버지를 통해
아버지 - 주인공 - 아이
를 통해
점점 채워져가는
그래서
아버지라는 거룩한 이름에 다가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말이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히로카즈의 영화속엔 그래도 담겨있다.
아름다운 영화이지 않은가?
나를 품어주고 사랑하기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예술작품들이 나를 살린다는 거다.
예술작품들이 나를 살려줬기에
그 많은 예술작품들 속에서
결국 나를 찾아왔고, 나를 발견해왔기에
나는 예술을 선택했고 예술가의 길을 꿈꿔온 것 같다.
공연을 볼때 극장안의 공기. 그 침묵.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세계...
그 세계들의 경험이, 나를 성장시켜줬다.
영화들... 많은 영화들 속에서 나를 보고, 나를 인식하고, 나를 품어줄 근거를 찾아왔던 것 같다.
희곡속에서. 체홉의 작품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속에서, 안토니오 부에로 바에흐의 타오르는 어둠속에서, 어느 계단 이야기 속에서...
그런 인식을 했다.
마셔 노먼의 잘자요 엄마를 읽으며. 그런 절대적인 고독에 대해 생각했고,
인생의 엇나감에 대해
텅비고
약하고
지루한
인생의 단편들에 대해 생각했으며.
이창동의 시를 보며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예술을 가장 가치있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중 하나가
나의 내면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공연이, 영화과, 그 많은 책들이 나를 채워주었으므로
강력하게 권면한다.
삶은 삶으로 채워나가는 거다.
삶에 대해 다루는 예술이야말로
삶을 채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거다.
또 하나의 방법론은
여행이다.
여행은 그 도시, 그 삶, 그 사람들에 대한 총체적 만남이다.
그래서 그 도시에선 그 도시의 삶이 있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 삶을 살찌워온거 같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 그 야경아래서 글을 쓰고.
파리 루브르와 퐁비듀센터를 왔다갔다 하며 관람했던 기억...
아침에는 그리스석상을보고, 저녁에는 제프 쿤스의 작품들을 넘나들었던 기억...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1달을 살아본 경험, 몽골이 거대한 모래언덕에서 지내본 경험....
마지막으로
함께함을 말해보고 싶다.
연애, 우정, 사업상의 만남, 선생과 학생들의 만남.
그 어떤 형태의 만남이라도
사람들과의 만남은
내 내면을 채워준다.
결국 진짜용기는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품어주고 사랑하는 용기이다.
그리고
진짜용기를 가질때
진정한 창의성이 나온다.
우리 모두에겐 특별함이 있다고 나는 굳건하게 믿는다.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우리 모두에게있으며
우리모두는 특별함이 잠재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별함은 특별한 능력을 훈련함으로서 키워지는게 아니라,
보편적 삶의 조건속에서
얼마나
용기있게
나자신을 이해하고 나 자신을 찾아내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가장 보편적인게 가장 특별한 것 아니겠는가?
가장 특별하고 가장 감동적인게 가장 보편적이란 건
숀튼 와일더의 <우리읍내>를 보면 잘 드러난다.
죽은 에밀리가
살아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을때
그 단 하루의 날은
가장 보통의 하루
였다.
가장 보통의 것들을
가장 절실히 그리워했다.
따뜻한 목욕탕, 따뜻한 커피, 엄마가 해준 밥, 작은 신발, 작은 그네, 동생과 함께 쓴 편지... 해바라기...
그래서 에밀리는 이렇게 말한다. 극중에서.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인생이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특별한 것이다.
살아숨쉬는게 기적이다.
우주 끝. 블랙홀의 끝까지 가서도
결국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숭고하고, 가장 중요한 기억인
가족과의 순간으로 돌아오는
인터스텔라의 통찰은 그래서 유효하다.
내 것들.
지극히 평범한 내 삶.
어쩌면 보잘 것 없는 내 삶. (가난했고, 이혼했고, 방황했고, 찌질했던 나의 삶)
그리고 너무나 평범한 내 삶의 조건들.
내 약점들
내 단점들.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워 욕이라도 하고싶은 그런 내 실수들.
내 보잘것없는 외모.
앞으로도 뭐 그다지 혁명적으로 바뀔것 같지는 않은 내 인생.
그 자체.
나는 그 삶을 사랑하려고 했고
품으려고 이해하려고 했을 뿐인데
이상하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뒤로
주변에서 사람들이 나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해주고
통찰력있고
창의적인 존재로 인식해주기 시작했다.
창의성의 근본은 나에 대한 용기이다.
진짜용기는
나를 받아주는거다.
보편적 나를 용납하고 사랑할때
보편적나는
가장 특별한 내가 된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가장 보편적인 것이 가장 특별한게
우리
인생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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