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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소녀들 ♥ 연극영화입시2016 포스팅 2016. 4. 2. 03:41
굿바이~ 소녀들 ♥ 연극영화입시
나의 고백
길고긴 4개월간의 소녀들의 도전과 꿈, 그리고 눈물과 환희를 지켜보며
오랫동안 정리한 생각을 모아
이 글을 쓴다.
몇가지 밝혀야 할 사실이 있다.
나는 실제로 학생들 연극영화입시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 분야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밝히는게 조심스럽다는 것.
이 분야에 대해 나름의 글을 쓸만한 최소한의 경험은 갖추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방송프로그램에 매우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 지속적으로 연극영화입시, 특히 연기자나 걸그룹, 가수등의 꿈이 위험한 환상이고, 우리 사회의 문제적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는 면에서 우려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밝혀왔다.
내가 이러한 형태의 방송프로그램을 매우 우려하는 이유가 있다.
暗 (어두운 면)
승자독식사회
나는 개인적으로 프로듀스 101이란 프로그램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
11명에 선발된 소녀들.
특히 가운데 앉게되는 소녀의 자리는 여왕같이 화려한 자리가 주어진다.
이 방송프로그램은 누가 되는지로 흥미를 끌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누가 떨어지는지를 통해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순위는 등수로 정해지며
철저히 배제되고, 퇴출되는 무자비한 세계이다.
시청자들은 응원하고 격려하는 것 같지만
실제론 가학적이다.
가학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의 승자독식사회, 경쟁사회의 이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11명의 승자가 있고
나머지의 패자가 있다.
철저한 경쟁사회.
로버트 플랭크와 필립 쿡은 저서 '승자독식사회 (The Winner-Take-All-Society)' 를 통해
이러한 경쟁사회의 폭력성을 냉철하게 꼬집은 바 있다.
승자독식사회는, 결국 대다수가 패배자에 머무는 사회를 뜻한다.
승자독식사회에서 승자는 넘치도록 많은 것을 얻지만
패배자는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승자독식사회의 극소수의 승자는 역사상 전례없는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있다.
로버트 플랭크는 메이저리그 야구선수와 마이너리그 야구선수의 예를들며 승자독식사회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는데,
메이저리그 선수와 마이너리그 선수의 기량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않다고 한다.
야구선수라는 전체 집단으로 봤을때 마이너리그의 톱클래스선수 역시 엄청난 기량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는 연봉 수천만달러의 차이로 귀결되기 때문에
도전자들은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모든걸 다 쏟아부어야 하는 끊임없는 경쟁에 노출된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전용기를 타고 이동하지만 마이너리그 선수들은 버스를 타고 미국대륙을 횡단해야 한다.
그토록 작은 차이가 모든 것을 얻느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느냐를
결정한다면
성공을 위한 강박증은 어쩌면 당연한 병리적 현상일 것이다.
한국사회야말로 그런 사회 아닌가?
인서울 대학 주요대학 합격권을 수능상위 약 5%라고 보면
100명중 5등안에 든다는 말인데
그 성적을 가지고도 열등감과 비교의식에 떨어야 한다.
항상 위만 쳐다보게 만드는 사회.
강박증적인 경쟁으로 내모는 사회.
초등학교때부터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때까지.
입시경쟁, 취직경쟁, 결혼경쟁, 자녀경쟁......
가학적으로 벼랑 끝까지 내모는 사회.
극소수의 승자와 대다수의 패배자로 내모는 사회.
모든 것을 얻는 승자와
전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대다수의 패배자들로 이루어진 사회.
한국 사회와 소름끼치도록 닮아있지 않은가?
현대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러한 병리적인 경쟁사회를 무턱대고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된다.
비판적으로 이 경쟁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필요하다.
'과연 우리 삶에서 이처럼 병적인 경쟁이 당연한 것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비판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이 방송의 시청자들, 방청객들이 그렇듯
10대학생들이 대다수의 시청자들이다.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승자독식사회의 어두운 면을
여과없이 학습시킬 수 있다는 점이
나를 가슴 아프게 했다.
너무 쉽게 자라나는 학생들이, 자신을 패배자로 규정짓기가 쉬운 거다. 승자독식사회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서재형 연출의 <더 코러스 오이디푸스> 란 작품이 있다.
LG아트센터의 그 비싼 극장을 텅비우고 객석에 덧마루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고
관객이 그 무대를 원형으로 둘러싸도록 구성한 독특한 무대의 공연이다.
마지막 라스트씬에서
오이디푸스는 문을열고
텅빈 거대한 3층 객석을 향한다.
오래도록...
한 명의 사람이
텅빈 객석을 올라간다는 건
너무나 거대한 스펙타클로 다가왔다.
나중에 공연에 대한 서재형 연출가의 인터뷰를 본 적있다.
서재형은,
"나는 오이디푸스왕을 읽을때면, 그 남자. 오이디푸스. 가 참 외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외로운 남자의 뒷모습을 관객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보여줄 수 있는 무대를 생각해본 것입니다"
너무너무 담백하고 멋진 연출의 변. 아닌가?
외로운 남자. 오이디푸스. 그의 뒷모습.
승자독식사회는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탈락자는 어서 빨리 쫓겨나야 한다.
패배자가 서 있을 자리는 없다.
승자독식사회는 철저히 승자의 밝은 면만을 비춘다.
뒷모습을 볼 수가 없다.
모자란 이들의 뒷모습. 그 뒷모습 을 비춰주는 조명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외모중심주의
마셔 맥루한의 말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미디어는 메세지이고,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란 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의 필요에 의해 미디어가 만들어졌으니
미디어는 인간종속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실 미디어가 우리 인간의 삶을 규정짓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즉. 인간이 미디어종속적이란 말이 된다.
그러한 시각을 제시한게 마셔 맥루한이다.
우리가 이렇게 생긴 사람을 예쁘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생긴사람을 매너좋다고 생각하고, 저렇게 사는 사람을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
이 모든 시각들을 우리는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러한 시각을 형성시켜 주는게 미디어다.
그렇다면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을 종속시킬 수 있다는 말이된다.
권력이 언제나 미디어를 가장먼저 장악하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종 선발된 소녀들을 보니,
탈락한 소녀들은 과연 그들의 끼나 재능을 보여줄 정당한 기회가 있었는지 조차 의문이다.
최종 선발된 11명의 소녀들은
거의 그간의 투표에서도 그 순위안에 들어왔던 소녀들이고
그 많은 소녀들이 보여줄 수 있는건
결국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단순하게 한마디로 한국사회의 미디어가 만들어낸
외모
라고 하는 어떤 기준에 부합하지는지를
1등부터 101등까지 줄세운 것은 아닐까?
현대사회가 점점 시각중심 사회가 됨에 따라
그러한 외모중심사회는 더욱 더 심각해지고 있다.
예를들어
성형수술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단어인지 생각해보자.
수술이란
사전적으로 병적인 병변을 외과적 행위를 통해 제거, 시술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어떤 획일화된 어떤 생김새에 대한 기준에서 벗어난 걸
병으로 생각한다는 걸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이다.
정말 물어보고 싶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어떤 외적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것이
'병' 인가?
왜 아무도
성형수술이라는 말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일까?
여자는 얼굴만 이쁘면 돼.
이쁜 여자는 고시 3관왕과 같다....
여자는 이쁘기만 하면 돼....
외모도 경쟁력이야. 능력필요없어. 외모만 잘 생기면 돼.
이런 사회적 통념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폭력적이고 편견적인지를 비판적으로 생각해보자.
외모중심사회는 무서운 편견에 휘둘린 사회이며
병적인 사회이다.
네이버로 검색하고, 유투브로 보고, 핸드폰을 보고, 모니터를 보고 TV를 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은
마셔 맥루한이 예견한 그 모습대로
시각미디어 종속적인 삶을 살고 있는건 아닌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나는 씁쓸했다.
허상의 꿈 - 꿈의 획일화
과연 걸그룹으로 성공한다는게 얼마나 힘들인인지 생각해볼때.
이 칼럼 바로 전 칼럼에서
교사.
의사.
공무원.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는 학생들.
즉.
일탈을 선택한 끼 있는 학생들이
선택하는
일탈조차 획일화된 사회는
정말 끔찍한 사회라는 글을 쓴적있다.
다양성이 상실된 몰개성이 엘리트집단 (예를들어 법조계)에 나타나는 것은
어쩔수없다고 보지만,
일탈. 쉽게 말해
노는 것 조차 획일화 되어 버린 사회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이런 몰개성화. 꿈의 획일화는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이 프로그램은 매우 우려되는 점이 있다.
다들 똑같이 일탈하고, 똑같은 꿈을 꾸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방식으로 데뷔를 노리고......
전시성 - 결국 자신을 전시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타자성. 주체는 어디로?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 중 하나가
결국엔
'초이스' 되는 형태의 선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전시성에 소녀들을 노출한다는 것이다.
전시성은 하나의 상징이다.
결국.
누군가에게 초이스 되어야 된다는 것.
이런 구도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청소년들에게 학습시킨다는 것.
초이스가 된다는 것은
결국
초이스 하는 자의 권력성에 너무 쉽게 노출되게 된다.
한편, 자기 자신의 주체성을 너무 쉽게 타자에게 넘겨주게 된다.
전시하는 자와
선택하는 자의 구도는
너무 쉽게
선택하는 자의 권력성에 자신을 무방비적으로 내어맡기는
위험한 구도이다.
그 초이스하는 권력이
어떤 형태의 권력인지에 따라 더욱 심각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내 운명이 내 미래가 내 진로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어야 하는
구도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도록
고착화하고 있지는 않나?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명 (밝은 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과 꿈의 아름다운 가치
이렇게 많은 우려 속에서도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며 가슴이 뭉클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을 보지않고 이 프로그램의 여러 문제점들을 너무 쉽게 비판하지 않았나
자기반성도 했다.
소녀들은 너무 아름다웠고
매력있었고
가치있었다.
도전한다는 것.
꿈을 꾼다는 것.
언제나 아름다운 가치를 준다.
돈키호테가 감동적인 이유는
이룰수 없는 꿈을 향해 도전하는 그 도전이야말로
인간성의 극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들의 도전은 그 자체가 감동적인 한편의 드라마였다.
선발되지 않은 그녀들에게서 감동을 맛보다
내가 특히 유심히 본건
선발된 11명이 아니라
무대에 3시간이 넘도록 서 있어야 했지만
결국 떨어져야 했던 최종인원에는 들었지만 선발되지 못한 소녀들이었다.
떨어진 소녀들이 함께 서로를 꼭 끌어안아주며 우는 모습에서
진심어린 위로와
하나됨을 볼 수 있었다.
정말 놀라운 장면이었다.
떨어진 소녀들이
오히려 더 서로를 격려해준다.
그 누구도 주저앉거나 포기하지않고
선발되지 않은 아이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모습은
전혀 예상치못한 감동이었다.
특히 12번 소녀에게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울지않고
의젓하게
꿋꿋하게
박수보내고
받아들이고, 선발된 친구들을 응원하는 의젓한 모습에서
뭔가 표현못할 감동을 받았다.
내가 앞서 언급한 그 구구절절한 모든 우려들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당당한 모습이었다.
12번 소녀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어쩌면
우리의 우려들이
그저 철지난 우려일뿐.
결국 이 아이들은
또 하나의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나갈거란
아름다운 희망 !
내가 12번 소녀를 찾아봤다. 한혜리~~~ 사진도 하나 올린다. 멋져서 !
오늘의 주인공은 12번 소녀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시청자들 모두가 그것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성장의 가치
내가 드라마를 전공하고 공부해보니
결국 모든 서사의 종착점은
성장에 있다는 걸 배운다.
성장은 아름답다.
인생이 결국 성장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에서 결국 무엇이 남을까?
육신? 젊음? 돈? 땅?
결국 남는건
과정 뿐이고
결국 그 과정에서 찾을 수 있는 진정한 가치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아이들의 선택을 믿는다.
그리고 이 프로듀스 101 이란 하나의 과정을 통해
그녀들이 성장을 얻을 수 있었다면.
또 프로그램이 그러한 성장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성공했다는
나는 그것은 충분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옳았음을 입증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답.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 내가 선택한 길을 증명하는 것이 정답이다.
결국.
이 프로그램을 끝까지 다 시청하고 이렇게 긴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의 결론은
소녀들에게 달렸다는 사실이다.
소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그리고
한명한명 진심으로 축복하고 싶다.
11명의 소녀들도 응원할 것이지만
탈락한 소녀들도 끝까지 박수를 쳐주고 싶다.
도전은 아름답고
성장은 가치있다.
무엇보다
그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인생엔 정답이 없다는 것.
정답이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옳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자기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는 12번으로 떨어진 혜리양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봤다.
이 소녀들이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될지 어떤 길을 가게될지는 다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그들의 선택을
그들 자신의 힘과 자신의 삶으로
입증하는 삶을 살게 되리라 믿는다.
너희들이 선택한 길이 정답이다.
그 길이 옳았음을
보여주리라 믿는다.
그런 가능성과 숙제.
모두를 우리에게 보여준
101명의 소녀들에게
박수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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