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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상 (연극영화과입시)2016 포스팅 2016. 4. 20. 00:37
믿음이라고 할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리는가?
믿음의 행위
믿음은 행위이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밥을 먹거나, 산책을 하거나, 음악을 듣는것처럼
어떤 행위이다.
행위는 곧 행동이다.
행동이란 구체적인 움직임을 뜻한다. 육체, 두뇌, 의지를 가지고 하는 행동.
믿는다는 것이 행동이라면,
믿음은
그 속성상
훈련되어 질 수 있다.
몸을 훈련하는 것
기술을 훈련하는 것을 연상해본다면 개념이 쉽게 떠오를 거다.
그러나
몸을 훈련하거나, 기술을 훈련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훈련의 영역이
바로
믿음을 훈련하는 거다.
믿음은 훈련되어진다.
사이비종교나 다단계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그렇게 극단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평범한 종교적 행위나, 정치적 신념을 떠올려봐도, 믿음이 훈련되어지는 것이란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중매체에 길들여진 이데올로기도 그렇다.
미디어에서 어떤 가치를 계속해서 강조하면,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욕을 하면서도 결국 대중들은 지속적인 미디어의 노출앞에 굴복한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의 개념을 통해
권력이 믿음을 통제할때, 어떤 잔혹한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증명했다.
믿음은 훈련되어지며, 심지어는 통제되어진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우리가 진짜 똑바로 산다는 것.
주체적으로 산다는 것
제대로 산다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건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란 것.
결국 삶은, 무엇을 믿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훈련되어질 수 있고,
심지어는 통제될 수도 있다.
무엇을 믿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통제한다.
믿음의 대상
믿음이 훈련되어지는 것이며
구체적인 행위라면
우리의 삶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안정적인 직장을 최고의 가치로 믿는 사람은 직장의 안정성의 유무에 좌우되는 삶을 살 것이며
남자가 믿음의 대상인 사람은 남자에게 통제되는 삶을 살 것이며
사람들의 인기가 믿음의 대상인 사람은
사람들의 인기에 따라 삶의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게될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
'결정된다' 는 표현이 다소 비약적이라면
최소한 좌우된다. 혹은 의존된다. 정도로 표현해도 좋을 거다.
어찌됐건,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에 좌우되게 되고
우리가 믿는 믿음은 결국 우리의 삶을 통제한다.
우리가 우리 삶의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믿음의 대상을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믿음의 대상은 '나'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믿음의 대상이 타자에 있을때
주체성이 상실된다.
내가 대학원생인데, 교수를 믿는다. 근데 그 교수가 내 생각과는 달리 나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삶은 무너지게 되겠지?
남편을 믿었는데, 남편이 나를 배신한다면? 평생 그 배신감에 추락한 삶을 살게될거다.
자녀를 믿었는데, 자녀가 내 기대와는 달리 엉망진창인 삶을 살게된다면?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되는가? 생각해보라.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없다.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나는 인맥에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예전에 제일 많이 듣던 이야기 중 하나가
인맥이 대단히 좋다는 거였다. 그런사람들을 어떻게 알고있지?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날 밤. 문득.
정말 죽고싶을만큼 마음이 힘들때.
핸드폰에 수백명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는데
이 야심한 새벽에
내 개인적인 삶의 기쁨과 슬픔을
아무 의심이나, 방해없이 나눌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을 많이 안다는게 내 삶을 바꿀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많은 사람들에게 잘 보여지기위한 노력들을 멈추고.
최소한 내가 가진 것이나 내가 만들어온 것, 혹은 내가 창출해낼 수 있는 효용성이 아닌
나 자체로 관심가지고 귀 기울여줄 가장 곁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모든 힘을 쏟기 시작했다.
부모님, 친척들, 그리고 어릴때 친구들.
그리고 손가락에 꼽히는 몇명 절친들.
단 몇 사람 만으로도. 나의 관계는 부족함이 없다.
결국. 인맥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만들어지는 거다.
유명인사가 친구만들기위해, 인맥만들기위해 동분서주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나의 존재가 인맥 그 자체이다.
내가 가진것이 사라져도
내 존재자체에 관심을 가져주고, 기쁨과 슬픔을 조건없이 나눌 수 있는 가장 곁에 있는 사람들.
그들이 결국 우리 곁에 남는다.
삶은 어떤가?
인생 그 자체는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가?
산다는 것.
아까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자녀가 비행을 저지르거나 패륜을 저지르는 건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잘 따르고, 훌륭하게 성장했고
그런 아이가
갑자기 사고로 죽어버린다면?
차라리 아이의 잘못으로 아이가 파멸하는 것은 받아들이겠으나
그렇게 선하고 행복하게 살았던 아이가 비참한 사고로 죽었다면?
삶의 조건 자체가 선한가?
평등한가?
어떤 아름다운 법칙이 지배하고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 자체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언제나 불확실하며. 예측불가능한
'신의 농담' 아래
내 던져진 것이 우리의 인생 아닌지?
우리 인생이야말로,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내 의지대로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도 유치한 것이며
삶 자체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 혹은 인생.
극적인 믿음의 상실을 드러내는 작품이 바로
올해 한예종 연극원 지정희곡이기도 한
안톤 체홉의 <바냐아저씨>이다.
바냐아저씨는
바로 앞서 언급한 대로
믿음의 대상이 잘못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냐는 한 사람의 성공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꿈을
교수 세레브레코프의 성공으로 대치시켰고
그의 욕망과 욕정을 그 거대한 초목표 아래 굴복시켰다.
그러나 세례브레코프가 결국 그가 생각한 것처럼 위대한 학자가 아니며
그 역시 한 사람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
바냐는 허무함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체홉은 심지어 진실된 연정 (사랑) 마저도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소냐의 야스트로프를 향한 순수한 사랑은
미모의 유부녀 앞에 흔들리는 남자들의 모습 앞에 희화화 되어진다.
안톤 체홉은 이러한 인물관계들을 통해
믿음이란 얼마나 나약한 것이며
그 믿음이 상실되었을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오직 절망뿐임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믿음의 순서
처음 학원을 시작했을때 도곡동 지하에서 수업했다.
가정집 지하에서 한평남짓한 공간을 연기반으로, 실내의 공간을 영화반으로 해서
연기반 부원장과 함께 시작한 작은 그룹과외였다.
6년이 흘렀다.
그냥 눈을 떴다 감은 것 같은데
6년전 내가 꿈꿔왔던 목표들이
완벽한 현실이 되어있는걸 보곤 놀라곤 한다.
나는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한 정도의 성취를가지고 성공했다고 한다면
그건 정말 부끄러운 일일거다.
세상엔 성공한 사람들이 정말 많거든.
나는 성공했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뭔가 인생에는
어떤 비결같은게 있다는 거.
무서운 어떤 법칙같은게 있다는 걸
너무 간절히 나눠주고 싶은 거다!
내가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나는 학원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어떤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게 아닌것처럼
솔직히 학원의 미래를 나도 잘 모르겠다.
잘되었다가 또 잘못되기도하고
내부적, 외부적 요인들로 붕괴될수도 있을 것이다.
망하는게 두려웠다면. 아예 시작도 못했을거다.
그 누구도 개척한적이 없는 분야를 나는 시작했고.
앞으로도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감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나는 위기가 오면 다시 거기서 또다른 희망을 믿을 것이다.
싹 망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고해도, 정말 진심으로. 그게 과연 잃은게 된 걸까?
언제나 그 곳에서부터 삶은 다시 시작될것이고,
그곳에서도 분명히 !! 내가 행복해야 할 !! 이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위대한 점이 바로 그런 능력이다.
히틀러의 가스실에서도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
그리고
스스로의 가치를 지킬 수 있는
신념.
예술가의 눈이 가장 정직하다면. 인간성의 극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그 가스실에서 찾는다는게
참으로 아이러니 아닌가? 쉰들러리스트처럼.
깊은 고난은 더 깊은 인간성을 발견하게 해주므로. 정말로 나는 두렵지가 않다.
삶은 놀라움으로 가득차 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나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될 것이고.
신비로운 꿈을 꾸게 될 거다.
사막도 좋고, 극지방도 좋고, 대도시도 좋고, 대자연도 좋지 않을까?
선택이 중요한가? 그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할 수 있는 나의 삶의 결실이 중요할까?
내가 무언가 조금이나마 더 성장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비결이 있다면
그건
믿음의 순서가 명확하게 자리잡히고 나서부터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
먼저 믿었다.
그리고 행동했다.
결국. 현실이 된 믿음을 경험했다.
내가 요즘 교회를 안나간지 몇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목숨처럼 아끼는 구절이 하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히브리서 11:1
먼저 믿었다.
그리고 행동했다.
결국. 현실이 된 믿음을
놀라움 속에서 경험했다!!!!
나 자신의 주체성.
나는 믿을만한 존재여서 믿는게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잘 알고 있듯이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나의 조건들
현실을 바라본다면
나는 나를 절대로 믿을 수 없다.
조건이 불평등한 것보다 나를 더 절망하게 하는건
내가 너무 악하고
비겁하고
나약한 존재라는 걸 깊이 자각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 자신을 믿을 근거를
자기자신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그럴수 있는 오만한 인간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 일 것이다.
어떤 고귀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땐
부끄러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기에
믿음은 순서가 중요하다.
먼저 믿는다.
그리고 행동한다.
결국 변화를 경험한다 !!!
믿음의 대상은 타인이 아니다.
어떤 목표도 아니다.
삶은 언제나 예측불가능하며
신의 농담은 언제나 무섭게 우리 삶을 때론 파멸시킨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꿈들이 너무 많고
아무리 꿈꿔도 불평등한 조건은 절대로 평등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때가 있다.
나 자신의 존재적 조건에 집중할때가 그렇다.
이기적인 것과는 다르다.
아기를 생각해보면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세상 어떤 아이보다도 더 소중한 아이.
어쩌면 세상 모든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게 나의 아이일 거다.
그 아이가 특별해서 인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객관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그 아이가 소중한가?
아니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내 선택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며
내 삶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건물수위를 하더라도 그 행동속에서 소중함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수위를 누가 당해내겠는가?
한예종 수위아저씨가 낙엽으로 예술을 한다면 (행복하게), 과연 실적 압박에 시달리는 예술엘리트와 수위 아저씨 중 누가 진짜 예술가일까? 경계는 혼란스러워 지지 않는가?
조건이 우리 삶을 좌우하게 허용해서는 안된다.
특히 타인들의 기준과 조건에 무분별하게 나 자신의 주체를 내어맡겨서는 더더욱 안된다.
언제나 세상 무엇이 사라져도
결국엔 내곁을 지켜줄 단 하나의 존재
바로 나 자신.
나 자신에서 출발해서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거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가, 우주 끝 블랙홀까지가서도
결국 다시 처음 시작한 가족의 시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나는 가장 작은 한 사람의 존재이며
온 우주를 담는 우주 그 자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를 믿어줄 수 있는 나.
나와의 관계가 좋은 나.
나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나는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
나와의 관계가 옳다면, 나의
인생에 정답은 없다.
내가 정답임을 입증하면 그게 정답이 된다.
믿음의 능력
결국 믿음의 대상은 1차적으로 나 자신이어야 된다고 했다.
그것이 삶을 바꾸는 지름길이라는 걸.
사람의 여러 놀라운 능력중 가장 놀라운 것을 꼽으라면
자아 라고 하겠다.
결국
나를 바라보는 또다른 나.
누군가는 그 또다른 나를 영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믿는다는 행위는
구체적인 행위를 가지고 있다.
왜 믿는대로 된다고 하냐면,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고
행위가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공부하면 합격하는 것처럼
믿음 자체가 마법처럼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라
믿음의 행위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생각과
행동과
의지와
구체적인 변화적 행위들이
우리 삶을 바꾸기 때문이다.
지금 꿈꾸는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먼저 믿으라.
믿음의 대상을 바라보지마라.
믿음은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것이다.
내 존재의 고귀함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내려준 고귀함이다.
소포클라스는 <안티고네>를 통해 결국 이러한 질문을 하고 있다.
하늘이 내려준 법을 신념에 따라 지키고자 하는 안티고네.
그리고 인간의 상황에 따른 법을 말하는 크레온.
결국 우리 삶은 이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고 소포클라스는 증거한다.
나 자신의 고귀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환경과 상황과 인간의 법에 따라오는가? (크레온)
아니면
그것은 하늘에서 주어진
불변의
조건없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적
고귀함인가? (안티고네)
선택은 여러분 자신에게 달렸다.
먼저 믿으라.
믿고 행동하라.
믿음대로 된 자신을 놀라움 속에서 경험하라!
먼저 사랑하라.
믿고 행동하라.
믿음대로 된 관계를 놀라움 속에서 경험하라.
먼저 이해하라
믿고 행동하라
믿음대로 회복된 관계를 놀라움 속에서 경험하라...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이다..... 사도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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