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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층'
층이라는 말이있다.
한자어인데
나쁜 말이 아니다.
한국말로는 어감이 나쁘지않은데
영어로 바꾸면 뉘앙스가 이상해진다.
class 정도가 적당한 단어인거 같은데
국내에서 통용되는 class란 말이 가지는 의미와
우리말 '층'이 갖는 의미는 다르다.
floor, level, story 그리고 class를 합친 단어가
우리말 '층'이다.
그리고 이 '층'이란 단어는
사랑의 속성을 파악하는데
가장 유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지금 네가 20대초거나, 고등학생이라면
좀 충격적이게 들리겠지만
지금 네가 만나고 있는 연인과
네가 결혼할 확률은
매우 적다.
물론 첫사랑과 멋지게 결혼하는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은
네가 지금 만나고있는 그 사람이 너의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십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이십대의 사랑도
이별은
만남에 앞선 전제조건이 된다.
만나면서 이별을 생각하고 만나라는게 아니다.
그렇게
계산하고 이리저리 재면서 만나라는 말이 아니라
언제든, 이 사람이 나를 떠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란
생각 정도는 하고 만나는게 좋겠다는 말이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이성의 마음을 얻기위해
네 곁에 있는 사람을
네 사람으로 만들기위해
노력하지 마라.
네 곁에 있는 사람에게
노력을 기울여야 할때는
오히려 '님아 그 강을 건니지마오' 정도의
노인이 되었을 때
아닐까 한다.
늙을수록
노력하는 사랑
멋지지 않을까?
내 사람이 되면 될수록
더 노력하는 만남이란
참 근사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 반대가 되어선 안된다.
'층' 때문이다.
이 글을 보는 너는 아마 십대후반이거나 이십대 초가 대다수일 거다.
이성에게 관심이 많고
이성의 마음을 얻기위한 팁을 얻고싶을거다.
그래서 연애코치나, 연애계발서란 것까지 나오고있는데
나는 회의적이다.
그런데 의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지고있는거란 생각이 든다.
사랑에서 가장 중요한건
타인이 아니라
너다.
네가 좋으면
그 사람도 따른다.
사랑에선 기독교적 이타적 사랑이
사실은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이타적이면
실패하는게
사랑이란
게임이다.
그러나 친구야.
한편으론 이타적이도 된다.
그것도 '층' 때문이다.
이 기묘한 양면성에 대해
좀 더 설명할까 한다.
class
사랑에서 중요한건
그 사람이 아니라
'너'다.
너의 층 class이 달라지면
사랑의 판도가 바뀐다.
너무 간단히 말해
이몽룡이 과거급제를 하고 나타나면 class가 달라진거다.
네가 남자라면
지금 네가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너무 노력하지 마라. 그녀의 마음을 얻기위해서.
미안하지만
헛수고다.
(네가 여자라면 더더욱 노력하지 마라!!!)
너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사랑은 한계가 있다.
사랑은 노력하는게 아니다.
끄는 거다.
오히려
너 자신의 가치 class를 높이는데 집중하는것이
결과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결정적 이유가 될 거다.
이 class를 너무 '사회적 성공'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사회적 성공만이 class라고 보면
실제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연애에서 반드시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 중 잘못된 결혼으로 고생하는 사람들 너무 많지않나?
오히려 이때 말하는 class는 너의 색깔, 너의 가치관의 정립
너의 삶의 방향성, 정체성, 개성, 능력, 매력이 갖춰지는
그런 의미에서의 수준이라고 보는게 좋겠다.
즉. 너의 문제란 거다. 연애는.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class를 높이는게
연애에서 이기는 방법이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흔히 수많은 글에서 봐왔던 이야기이다.
그렇지않나?
그러나 '층'이라는 단어가 사랑에 절묘한 이유는
또 다른 의미 때문이다.
level, story 즉, 사랑의 결
십대후반, 혹은 이십대를 살고있는
너의 사랑은
이별을 전제로 깔고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서두에 했다.
친구야.
그러나
진실되게 사랑하길 바란다.
왜냐면
'층'때문이다.
층이라는 단어 속에는
단계, 혹은 과정, 혹은 삶의 결 ...
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결
이라는 단어
참 멋지지 않나?
사랑의 결
그래.
사랑을 승리로 이끄는 건 class 이기도 하지만
'결'이기도 하다.
이건 마치
좌뇌와 우뇌의 공존과 같다.
사랑의 이성적 속성과 감성적 속성이라고 봐도 좋다.
나는 가장 멋진 사랑은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는 사랑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네가 지금 만나고있는 사람을
뜨겁게 사랑해라.
너의 과정을 단단히 채우는
네 삶의 정체성과
결을
단단히
채워가는
사랑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이기 때문이다.
네 곁에 있는 그 사람을
혹시 떠나보내게 된다 하더라도
네 삶의 결을 단단히 채울 수 있었다면
너는 그만큼 성장할 수 있을거다.
더 많이 사랑해서 후회하는건 없다.
그 사람을 뜨겁게 사랑했다면
그걸로 충분한거다.
수많은 실수와
미성숙한
미생적 상황이 있어도
그것은 청춘이라는 이름앞,
삶의 '결' 앞에 서게 되면
그 많은 실수들조차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테가 된다.
귀한 목재일수록
나이테가 선명하고
그 나이테의 간격이
굵다.
떠나는 것을 알면서도
최선을 다해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건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다.
아름다운 의미로
이기적인 사랑이다.
사랑의 주도권을
끝내 놓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이별의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건
사랑의 결 때문이다.
사랑의 결과론이 아닌
과정론을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랑을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면
지금의 아픔도
아쉬움도
때로는 상처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거다.
결론은 하나다.
사랑의 주체는
타인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것.
이성적으로는
사랑의 class.
즉
당신의 가치와 정체성과 본질을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그 사람이 널 떠났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네가 훨씬 달라진 모습으로 변화될때
그 사람이 널 아쉬워 하게 될거다.
그러니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위해 애쓰지 말라.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너의 모든 것을 내어주지 말아라.
이건 연애의 이성적 측면이다.
class.
그러나
한편으론
떠날 걸 이해하면서도
낭비인 걸 알면서도
실수인 걸 알면서도
상처인 걸 알면서도
사랑에 너를
던져라.
그 순간에 충실한 너의 사랑이
너라는 본질을 더욱
두껍게 채워주고
너를 성장시키고
너의 결을 더욱 귀하게 가꿔줄 것이기 때문이다.
결.
class와 결 은
상반된다.
그래서 사랑은 미묘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우리 삶으로 채워가는 story-telling이다.
하지만 원칙은 있다.
주인공은 너여야만 한다는 것.
주인공에서 내려오는 순간
사랑의 무대에서 네가 내려오는 순간
사랑은 막을 내린다.
해피엔딩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시련이 깊은 건
더 예술성 높은 작품으로 가는 지름길 아닌가?
스토리이론 속에 삶의 비결이 숨어있다.
잔잔한 드라마를 찍을 것이냐
가슴 찢어지는 비극을 찍을 것이냐
애로영화를 찍을 것이냐
액션영화를 찍을 것이냐
그것은
장르의 문제 아니겠는가?
네 사랑이 가슴아프다면, 그 가슴아픔이 나는 참 멋지단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랑의 가치가
네 삶을 적셔주기에
넌 그 사랑을 포기 못하는거 아니겠는가?
그럼 해라.
네 사랑이
잔잔하고 일상적이라면
그것도 참 근사한 사랑이다.
평범한 것이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이니까...
육체와 욕정으로 채워진 사랑?
그것도 좋다.
세계적인 트랜드다.
장르의 문제
아니겠는가?
결론은 하나다.
네가 중요하다는 것.
사랑의 층은
바로
네 인생의 층이다.
네가 채워가는
무대위의 삶.
한 편의 연극.
그렇다면
주인공으로
당당히
삶을 받아들이라.
조연으로 전락하지 말라.
상처앞에서도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015. 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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