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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하고도 꺽인 서른이 되고나니
연애가 부질없다.
나도 뜨거운 연애를 했었고 적극적이고 활동적이고 열정적이었다.
뭐, 지하철 앞에서 우연히 만날걸 기대하고 그녀 집 지하철역에서 약속없이 몇시간이고 기다려보고
이런 미친 짓 나라고 안해봤을 것 같나?
편지 써서 공원에서 읽어주고 그런 작고 소소한 낭만. (보통 이런 미장센엔 1)가로등불빛, 2) 흔들리는 그네에 여자가 앉아있을 것. 그리고 그네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어야 함 3) 이 공원은 그녀의 집에서 그렇게 멀지않은 작은 공원임. 이 3요소가 필수로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또라이 같은 연애
안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가면서
이젠 제법 앞가림 할 나이가 되고
사회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그에 반비례해서 연애에 대한 감정이 식어가기 시작한다.
이성에 대한 갈증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연애란 부질없는 행위임을
추억의 층이 깊으면 깊을수록
남는 것은 더 깊은 상처뿐이며
연애 중에 주고받는 그 수많은 사랑의 고백들이
모두 손바닥으로 움켜진 모래먼지처럼
기억의 터널속으로 빨려들어갈 거란 걸, (그것도 반드시. 반드시 말이다. 너도 예외없이. 너 스무살이냐? 연애하냐? 그럼 틀림없어야~~ 나중에 이 글 다시보고 내말 맞나 틀리나 확인해봐. 사랑한다는건 이미 헤어짐이 속해있는거야. 사랑안에 헤어짐이 들어있는거니까)
경험으로 알기 때문인지,
연애의 모든 과정들이
익숙한 낯섬으로 느껴진다.
마치 어린시절 뒹굴던 - 추억이 서린 옛 동네가
오랜만에 찾으면 새롭고 반갑고 정겹지만
이젠 그 집에서 살기엔
내가 너무 커졌고
그 골목은 너무 작고
그곳에서 쌓았던 추억들은
이제 흘러간 과거가 되어 버린
기묘하게 낯선
반갑지만 불편한, 그리고 결국엔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그런 감정.
익숙하고도 낯선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는가?
서른 중반이 넘어서면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건 너무나 전형적인 과정이 있다.
연애의 과정들
서로 눈치보고
서로 밀땅하고
서로 감정을 키워가는
서로 마음을 표현하면서도
마음을 숨기려하는
그 교묘한 이중성
그 과정들
다 안다.
익숙한 과정이니까.
그런데
낯설다.
싫다.
막막하다.
두렵다.
마치 옛 기억 속 첫사랑이 머물던 동네처럼
다시 찾아가보면
생각보다 초라한 모습에 실망해
돌아서는 전철역 안에서
괜시리 생각만 복잡해지는
그런게 30대 중반의 연애인가 보다.
서른 넘은 여자들은
그들이 만나고 싶어하는 서른 넘은 남자들이
왜 그리도 적극적이지 않은가에 대해
서른 넘어 자신의 매력이 떨어져서인가보다 라고 단정짓지만
장담컨데 아니다.
여자의 문제 아니다.
남자의 문제다.
남자의 마인드가 변하는게 더 크다.
사회에서 어느정도 자리잡아가고
연애의 경험 어느 정도 있으며
이미 알꺼 아는
그런 나이
그런 나이의 남자들이
급속도로 연애 자체를 낯설어하기 때문에
30대는 남성이건 여성이건
연애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나는 갈망한다.
만나보니
헤어져보니
제일 중요한게
사랑도 아니고
열정도 아니고
밀땅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더라.
사랑에서 제일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용기'더라.
난 이제
더 좋은 이성을 만나려는 노력을 멈출 것이다.
더 나은 조건, 더 나은 외모, 더 나은 성격을 찾아 헤매고
서로 감정을 숨기고 감추면서 서로를 떠보는
그 유치하고 시시한
연애놀이
이제 그만 할거다.
사랑이란 뭘까? 수많은 비유가 있겠지만
세계적인 심리상담가 로렌스 크랩은
사랑을
절벽위에서 끈 하나 허리에 묶고
그 절벽 아래로 뛰어드는
행위에 비유했어.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사랑한다는건
절벽에서 활강하는 것만큼이나
두렵고 새롭고 그러나 짜릿하고
그리고 불안정한 모험인거야.
그러나
그 모험을 시작하면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건
내 몸에 묶인 밧줄이 있기 때문.
그 밧줄이 바로
신뢰의 밧줄이야.
즉. 로렌스 크랩 박사에 의하면, 사랑이란 신뢰라는 밧줄하나 묶고
서로를 향해 미지의 절벽아래로 뛰어드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하고도
무모한
도전인거지.
그런데 이 신뢰는
서로를 향한 신뢰가 아니야.
꽤 놀랍지?
서로를 향한 신뢰가 아니라는것이?
근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어.
서로를 신뢰한다는 것 만큼
어리석은게 또 있을까?
너는 너 자신을 돌아봐.
넌 신뢰할만한 사람이야?
인간이 과연 그 어떤 인간에게라도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주체가 또다른 주체를 맹목적으로 신뢰하는건
너무나 허무한 일이다.
너무 쉽게 무너지는 약속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고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생각보다 계산적이거든.
그럼 도대체 무엇을 신뢰해야 하나?
우선 로랜스 크랩 박사는
절대자에 대한 신뢰를 언급하고 있어. 물론 로랜스 크랩, 래리 크랩 부부는 미국인이라 아무래도 종교적인 베이스를 깔고 사유를 하니까 이 부분은 이 정도로 언급하고.
결국 네가 신뢰해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사랑을 선택한 우리 자신이야.
나의 주체를 내가 믿는거야.
사랑은 결국 내가 하는거야.
나와 또다른 한사람이 하지만
생각해봐.
사랑하면 닮아가잖아?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거잖아?
그래서
서로를 향한 신뢰는 본질이 아니야.
본질은
나의 주체를 신뢰하는 나와
나의 주체를 신뢰하는 또다른 나.
그 주체와 주체의 만남인거지.
서로를 신뢰한다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네가 선택한 그 사랑에 대한
너의 신뢰와
그 사람이 선택한 그 사랑에 대한
그 사람의 신뢰.
이 두 사람의 신뢰가
서로 만나
하나의 신뢰가 되어가는 과정이
사랑의 과정인거야.
그래서 칼릴 지브란은 이런 그의 유명한 책 <예언자>에 이런 시를 남겼어.
<결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리하여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그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사랑이 그대 두 영혼의 해변가 사이에서 출렁이는 바다가 되게 하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으로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있게도 하라.
마치 류트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그대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편백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사랑은 무모해서 아름다워.
생각해봐.
가장 낭만적이고, 가장 기억에 오래 남고, 평생 가슴떨려하는
천만금의 황금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진짜 사랑을 받은 경험은
이성과 익숙함과 계산과 당위성을 뛰어넘는
무모한 사랑을 경험할 바로 그 순간 아니야?
사랑을 아름답고, 비약적으로 승화시키는
사랑의 비약.
아름다운 무모함이
우리 인생을
가치있고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아니야?
그런 사랑을 꿈꾸는것 아닐까?
그래서 순서가 중요해.
신뢰할 수 있어서 용기를 내는게 아니야.
이 순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오늘도 수많은 여자들이 된장녀 소리 들어가며, 남자조건 찾아 헤맨다는 오명을 뒤집어쓰지.
근데 자세히 뜯어보면 여자들이 남자의 조건을 보는 이유는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안전하고 안전한 길.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고 검증되었고 익숙해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선배의 위계로, 부모라는 위계로, 선생이라는 위계로, 친구라는 위계로, 방송이라는 위계로
강요하고 세뇌하고 있기 때문 아니야?
좋은 남자 찾아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말아라.
그래서 찾고 찾은 좋은 남자라고 해봐야
결국 적당한 직장에 적당한 외모에 엄마 등쌀에 잘 관리된 유형의 남자일텐데
중요한건
여자들이 고르고 골라봐야
기준이 획일적이라
그 별것 아닌 남자들, 그 남자의 어머니에게 사육되고 길러진 그 남자들이
결혼시장에서 엄청난 갑 행세를 한다는 거야.
수요와 공급 법칙에 의해서
한국사회가 만들어주고 제시해주는 좋은 남편의 기준이 너무 획일적이라
너만 그 남자를 고른게 아니란게 문제가 된다는거지.
모든 부모들, 결혼정보업체, 모든 기성세대들이 제시하는 기준이라고 해봐야 결국 똑같은거야. 너도 고르고 고르면 결국 똑같은 선택 하게되는거야.
당장 듀오니 선우니 하는 결혼업체에 가봐.
여자는 수십만원~ 수백만원의 돈을 내고
남자는 조건이 되면 공짜야.
기가 막히지?
고르고 골라봐야
악수를 두게 된다.
진짜야.
평생 자기 잘난줄 알고
자기가 갑인줄 아는 남자, 그래서 혼수가 어떠니, 집이 어떠니 이런 소리하는 남자.
그리고 그 남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는 그 남자를 사육하고 기른 남자의 엄마.
불행하지 않은게 이상한 일이지.
서른하고도 꺽인 서른이 되어보니까
사랑은
용기란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내 이상형을 물어보면
나는
나를 향해 용기내는 여자라고
나같이 불완전하고
엉터리인 한 인간을
사랑하고 용기를 낼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나의 이상형이라고
난 말할꺼야.
신뢰하기에 용기를 내는게 아니다.
용기를 냈기에
신뢰할 수 있는 것일뿐.
적어도 사랑은 그렇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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