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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돋움 (2)- 외로움에서 고독으로(한예종 입시학원, 레슨 포 케이아트, 성균관대 영상학과 수시, 성대 영상학과, 한양대 연영과)연극영화과에 대해 말하다 2014. 9. 28. 17:04
이 글을 쓰는 나도 외롭다. 두번 외롭다.
나이 서른넘어 정신적 사춘기도 왔다 (이별을 통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쪽 팔린다)
그렇지만 한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건
내 영혼이
반드시
그러한 아픔을 겪고
또 한단계 성장했다는 것이다.
내가 현재 지금 외로움을 깊이 묵상하고 있으므로
외로움에서 고독으로의 발돋움을 헨리 나우웬의 사유에서 모티프를 얻어 연재형식으로 포스팅하고자 한다. 오늘은 그 두번째 순서이다.
외롭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혼자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돌봐줄 사람이 없고
버림받고
온세상에 단 나 하나 남겨져서 춥고 배고프고 지독하게 공허한
사막 속에 내 던져진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외로움을 보다 더 깊이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외롭다는 것의
진짜 의미에 대해서 -
외롭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라 했다.
그런데 외로움은 관점에 따라
또한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외로운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사실은
일종의 생소함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경외함'이라고 하는데 영어단어로는 fear , 또는 awesome 이라고 한다.
귀신이 무서운 이유는 그 존재가 생소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귀신이 해악을 끼친다는 면에서는
가장 안전한 존재에 가깝다. 죽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귀신 입장에선 억울할 것이다. 그(혹은 그녀)는 그저 당신과 소통하고 싶었을뿐이다. 귀신은 물리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무섭기로 따지면, 나이트클럽에서 방금 만난 오빠, 혹은 그녀가 훨씬 더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간밤에 그자가 무슨짓을 할지 모르지않는가? 필리핀 여행중에 만난 이상하게 친절한 한국인이 귀신보다 천배는 더 물리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필리핀에서 한국인이 친절하게 다가오면 두려워하기 보다는 반가워한다. 왜냐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실제로 위험성이 높고 낮고를 따져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익숙한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위험하고 잔혹한 것이라도 인간은 그것을 편하게 받아들인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사유가 나온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독일을 연구하며, 집단적 광기 속에서 인간정신의 순결성이 훼손되고, 그 훼손된 상태를 익숙함으로 받아들이는데 채 몇주가 걸리지 않음을 밝힌적이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악의 평범성 개념이다.
그러나 귀신은
무섭다.
그것. fear, 혹은 awe는
익숙하지 못한 것을 경험할때 오는 일종의 생경함이다.
생소한 경험, 생경한 경험을 할때
인간은 두려워한다.
비근한 예로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는건 당연하지만
거대한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면 믿겠는가?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본적도 없고, 우주여행을 해본적도 없지만
항공기를 타고 공중으로 뜰때
그러한 감정을 느껴본적은 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거대한 지평선을 보며 동일한 기분을 느낀적도 있다.
거대한 자연을 만날때
내가 상대적으로 너무나 작다는 것을 느낄때
생소한 장면을 볼때
나는
일종의 fear를 느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너 창작하고 싶나?
정말 작가가 되고 싶나?
영감있는 감독이 되고 있나?
영감을 네가 받지 않고
영감의 수혜를 받지않고
영적인 감각 = 영감인데
그런 영적인 감각의 기름부음을 받지않고
네가 과연
타인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까?
영감을 못 받은 자가
타인에게 영감을 주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볼때의 그 참담한 기분아는가?
내가 영감을 느꼈다면
그냥 말만해도 전해지는게 영감인데
그런 경험이 없으니
어디서 책을 보고, 무슨 예화집같은걸 외워서 바득바득 소리지르는 설교자를 볼때
작가를 볼때
기분이 어떤가?
그런데 진짜 영감을 경험한 사람의
말은
다르다.
힘이있고, 중독성이 있고, 매력이 넘친다.
예를들면, 종교적 신념과는 다르게 (종교중립적으로, 개인적으로 조용기란 인물이 매력있는 인물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단 그가 도덕적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연구할만한 캐릭터임엔 틀림없다. 순복음신자들은 공격하지 말라. 난 순전히 예술적 관점에서 캐릭터를 연구한거라고 !)
조용기라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가 유식하거나, 많은 지식을 공부하고, 많은 책을 읽어서
그의 말이 영향력있는게 아니다.
조용기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영감에 압도된 사람이다.
그는 경험을 단상위에서 쏟아붙는다.
그의 설교는 들은적이 없지만
그의 책은 읽어보았다.
글자수도 많지않고, 표현도 직설적이지만
그의 문장은 매우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는 그가 말하는 것을
진짜로 경험했고, 아니면 경험했다고 믿고있음에 틀림없다.
진짜 경험이 가장 강력한 호소력이 있는 법이다.
경험이 없다면, 최소한 경험을 했다고 믿기라도해야 될거다.
교주가 될 필요는 없지만, 교주의 방식은 연구할 필요가 있다.
왜냐고?
제임스 카메룬이 타이타닉으로 아카데미상을 받고 단상에서 한 말이 뭔가?
'나는 세상의 왕이다'
그래.
어쩌면 예술과 종교는 유사성이 많다.
어찌됐건 추종자를 끌어들어야 한다는 면에서 그렇다.
돈되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 경험을 파는데
돈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핸드폰을 파는것과
영화를 파는 것은 차이가 있다.
모든 감독은 교주적 마인드가 있어야 한다. 종교와 예술의 유사성때문에.
어차피 백남준이 그러지않았는가? 예술은 사기라고 !
경험하지 않고 경험을 말하는 설교자의 비참함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경험이 없으니까
말하자면 오감이 떠지지 않았으니까
여기저기 책에서 기웃거리고, 썰렁한 농담에 의지하고...그런거다.
이제부터 핵심이다.
외로움은
외로움에 그쳐서는 답이 없다.
히끼꼬모리가 되어 인형과 연애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수의 영감있는 사람들은
모든 인간에게 허락된 외로움을 동기삼아
고독이라는
지배적 가치로
승화시킬 줄 안다.
외롭다는 순간은
인간의 실존 근본에 가장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이며
나 자신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막과 마주하는 순간이며
또는 나의 삶. 나의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우주와
처음으로 대면할
기회의 순간이다.
외로움을 사람들이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저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
나 자신 안에 있는
거대한 능력, 힘의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마치 스타워즈나 쿵푸팬더 같나? 그게 꽤 보편적인 진리이기 때문에 영화에서 그런 사유들을 차용하는건 아닐까?)
그것은 두렵고, 때로는 불편한 감각이다.
익숙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롭다면
그 외로움을 붙잡아라.
그리고 고독한 순간으로 발돋움하라 (헨리 나우웬의 명작 '발돋움'에서 인용)
이 고독한 순간에서야 비로소 -
엄청난 인식과 실존적 경험과 지혜와 통찰의 댐이
터져나오게 될 것이다.
예술적 영감을 주고자 한다면
네가 영감을 받는 수밖에 없다.
그 영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전부 고독한 순간에 온다.
혼자인 순간에서야
그 영감의 날 (the day)이 찾아온다.
나는 깊은 밤에 혼자 책을 읽을때
특히 고전을 읽다 어떤 한 구절 속에서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며
두려움 fear을 느끼기 시작하며
무언가 거대한 영감에 사로잡힌 경험을 한적이
많았다.
모든 종교 중 고등종교가 강조하는 것은
기도, 묵념, 묵상, 참선, 도 닦는다 등의 모든 행동적 지침은
모두
일종의 같은 감각적 경험을 요구하는게 아닐까?
고전을 읽을때 그런 경험 한 적이 있고
홀로 아프리카 탄자니아 다르에르살렘 여행을 가서 적도근처의 별빛을 보며 그런 영적인 경험을 했다.
나중엔 아예 고독을 연습하고자
매일 새벽에 시간을 정해두고
깊은 묵상과 깊은 호흡을 몇년 넘게 실천한 경험도 있다.
성경이라고하면 나 역시 인간본연의 텍스트, 가장 영향력있는 서사텍스트라고 생각해서 무려 2독을 했다. 그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두번이나 읽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냥 읽은게 아니라 메모지에 적어가면서 외워가며 읽었다)
이런 영적인 경험이 풍부하고나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글을 쓸때 10분~길어봐야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전에비해 글에 대한 반응은 차원이 달라졌다.
무슨 일을 해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는 사실 글쓸때 뭔가 자료를 찾거나 fact를 찾는것 매우매우 귀찮아한다.
학생들을 가르칠때도 무언가 fact를 연구하진 않는다.
한예종입학이나, 예술적 성취들도 전부 이런 영적인 눈을 뜨고 난뒤에 술술 풀린 일 중 하나이다.
아직은 내가 나이가 젊어서 무언가 거대한 성과를 낼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무언가 하는 일마다
쓰는 글마다
상담이나 강의할때마다
남다른 영향력이나 설득력이 생기는걸 경험한다.
이 블로그에 내가 쓴 글. 순전히 내가 창작한 글이 약 570개 정도 올라가 있는데
나같이 아이큐도 낮고, 별 실력없는 사람도
고독의 맛을 깨우치다보니
글을 쏟아내는게 이 정도는 된다.
내가 워낙 기본이 약한 사람이라 이 정도에 그칠뿐이지
이 글을 읽는 너처럼
머리도 좋고 외모도 출중하고 재능도 많은 사람이라면
네가 고독의 맛을 알고
네 삶 속에
고독의 힘을 끌어들일 그 방법만 훈련받게 된다면
너는 놀라운 힘을 얻을 수 있을거다.
자기개발서라는거 나도 역겹다.
그래서 이 블로그가 자기개발서 비슷한 모양으로 가지 않기를 매우 바란다.
그러나
모든 자기개발서가 대부분 개소리지만
공통적으로 무언가 담고있는 어떤 무형의 진리는 있다.
시크릿이란 책도 그렇고, 축복이 이끄는 삶인가? 그 책도 그렇고, 긍정의 힘도 그렇고, 또는 꿈꾸는 다락방도 그렇고...
대부분 엉터리지만
그 책들이 공통적으로 무언가 증언하는 어떤 세계가 있다.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
일상속에서 일하기 바쁘고,
또는 친구들이랑 수다떠느라 항상 분주하며
TV쑈 프로그램과 핸드폰에 중독되어서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어떤 세계
어떤 힘
어떤 능력
어떤 포쓰 (스타워즈 식으로)
어떤 참선 (동양식으로)
어떤 차원
어떤 깨달음 (불교적으로)
어떤 광기의 세계 (예술가적으로, 특히 아르또)
어떤 또다른 소우주 (물리학적으로)
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차원의 능력을 끌어올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눈뜬자와 눈먼자의 격차만큼 벌어지는 것이다.
예술가의 경우엔 어떻게 적용되는가?
외로움 속에서 두려워하지말고
외로움 속에 충분히 젖어들어가라.
외로움이야말로
기회이지 않은가?
외로움은
고독의
어미이다.
외롭지 않으면
고독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일종의 수혜이다.
외롭다면
그 외로움에서 탈출하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치지말고
오히려 외로움 속에 깊이 머물라.
그 머무는 작업을
너의 예술적 작업으로 하라.
사진예술가라면, 사진을 찍을 때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승화되는 기회를 잡을 수 있고
화가라면, 그림을 그리면서 고독을 맛보고
영화감독이라면, 시나리오를 쓰면서 고독을 맛보아야 할거다.
시인이라면 시를 쓰면서
소설가라면 소설을
......
이렇게 네가 예술가를 꿈꾼다면
너의 창작의 근원
창작의 에너지
창작의 근원적 원천을
고독함에 두라.
고독해지는 순간에
창작을 하라.
영혼의 깊은 밑바닥에서
창작을 하라.
유진 오닐의 증언과 같이
그는 작가인 그 자신의 삶을 소재로 삼아 쓴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쓸때
한줄 한줄을
눈물이 핏물이 되는 고통적 고독, 공허, 외로움 속에 떨어가며 썼다고
그의 아내 켈로타가 증언한바 있다.
<밤으로의 긴 여로>속에는 깊은 영감, 작품 전체를 영적인 성령이 떠돈다. 부유한다.
생각해보니,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 속에는
그러한 영감, 고독, 그리고 깊은 통찰의 세계가
뿌리박혀있다.
영감이 없이는
위대함의 반열에 들수가 없다.
오늘날의 문화. 시각중심, TV, 인터넷, 게임등에 중독되게 하는 문화가
그래서 위험하다.
특히 예술가들에겐 치명적이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현대문명의 저주이다.
페이스북, 카톡, 스타벅스에서 무의미하게 수다, 드라마, TV, 쑈프로그램등에 일상의 전부를
외롭지 않을 느낌을 위해서 쏟아부어서는
영감있는 예술은
때려 죽여도 할 수 없다.
요즘 여자들은 유머러스한 남자가 좋단다. 이 말은 한마디로 외롭지않게 해줄 남자를 원한다는건데, 마치 집에서 츄리링입고 나쵸씹으며 보는 쑈프로그램에서 느끼는 익숙한 느낌을 남자와의 데이트에서도 느끼고 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진짜 괜찮은 남자는, 너를
외롭지않게 해줄 남자가아니라
너에게 그의 고독을 전념시켜줄 남자가 아니었던가?
스페인 최고의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에호의 <타오르는 어둠속에서>에서
장님 이그나시오는 또다른 장님 후아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나는 장님인 너를 사랑해. 정상인인 척하는 너로서가 아니라, 장님인 너를 !
그리고 나는 꿈이 있어. 앞을 보는 것! 내 존재의 모든 가치가 소멸할지라도
나는 앞을 보고싶어!
라는 고백을 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나오는 인생에 대한 은유와 마찬가지로 (눈먼자가 눈먼자를 인도하는 세상)
일종의 은유이다.
이그나시오는
실존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말과 위로로, 실제의 상처입고 연약한 후아나를
감추는 것이 아닌
상처입고 연약한
후아나
그 모습 그대로 한 실존도 남김없이 그 존재 그대로 -
사랑하겠다고 말하고 있는게 아닌가?
그래서 아름답다.
장애우란 말은 역겹다.
장애인들은 장애가 있음은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그건 어쩔수없는 조건이니까. 장애인들이 원하는건 다름이 아니라, 미화시키지도, 조롱하지도 않고
장애를 그저 장애로 있는 그대로 봐주는
동등한 시각을 원한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너의 소우주와 그 남자의 소우주가 만나
또다른 평행우주를 만드는
그런면에서라면
고독은 전념될 수 있다.
나의 고독은 상대방의 고독을 자극하고.
그래서 함께 성장해나갈 수가 있는것이다.
이런 사랑이라면, 그 어떤 상처도, 그 어떤 아픔도 극복가능하다.
서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사랑이라면 말이다.
네가 예술학교에 진학해야될 단 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고독은 전념되기 때문.
그 이유 하나이다.
서로의 세계와 세계가 만나졌을때
또다른 평행세계 (평행우주이론)이 파생되고 펼쳐지고
영감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술가들은
교류하고
소통하는거다.
그러나
네게 고독의 순간이 없다면
서로에게 예술적 고독함이 전무하다면.
그럼 뭐하겠는가?
무의미한 비본질에 인생을 낭비하는 수밖에 없지.
후배들 모아서 머리 박고, 02학번이라는 놈이 OT에 와서 순진한 신입생 하나 얻어걸릴까 기회나 엿보고 (역겹지 않냐?), 온갖 엉성한 폼이란 폼은 다잡으면서
실제론
그 어떤 생산도 불가능한
불임예술 코스프레나 하게되겠지.
그러니
혹시 네가 대학을 가고자 한다면
먼저 고독의 맛부터 배우라.
극작가라면, 희곡을 읽어라.
위에 소개한 안토니오 부에로 바에호 작품 한번 읽어봐라.
그리고 친구들만나고 다니기보단, 네 스스로 깊은 고독의 시간을 많이 만들고
일기쓰고, 여행하고, 걷고, 산책하고, 관찰하고...
그게 먼저고
그 다음이 교육을 통한 예술적 소통 (네가 뭔가 가진게 있어야 네 것을 교수들이 키워주지)
그 다음이 다른 예술가들과의 소통 (가진 것과 가진 걸 서로 교류하는 거니까, 역시 네 것이 없으면 너는 상대방의 시다바리, 혹은 이용당하는것 밖에 더 되겠냐?)
미리 말하지만, 예술이란 것, 고독함 이라는 것
중독되면
참 좋을거다.
그거 굉장히 중독성있거든.
내가 보증한다.
www.lesson4kar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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