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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출난 재능 아니다 (한예종 서창과, 한예종 극작과, 한예종 연극학과, 성대 연출과 수시, 성균관대 영상학 수시, 한예종 전문사 영어, 한예종 영어정답)연극영화과에 대해 말하다 2014. 9. 7. 11:25
누가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면
주저없이 짐 콜린스의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을 추천할 것이다.
김영사에서 제목을 왜 그런 제목을 지었는지 모르겠는데 (원제는 built to last)
아무튼 야만적인 편집자의 만행으로 이 위대한 책의 제목이 마치 3류 자기계발서처럼 보이지만
위 책은 걸작 중의 걸작이며
이 블로그를 꾸준히 읽은 사람은 눈치했겠지만,
레슨 포 케이아트라는 일종의 학원을 나는 기업경영으로 생각하는데, 그 기업경영의 철학. 또 내 인생경영의 철학의 상당부분을 위 책에 빚지고 있는 중이다.
수많은 위대한 내용들이 있지만
오늘의 주제에 맞는 내용 하나만 소개하면
위 책은 비전기업이라고 명명한, 괜찮은 기업을 뛰어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한 기업 8개를 선정해 그 비결이나 성공의 원인등을 분석한 책이라 보면 되는데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위의 비전기업들에는 흔히 스타로 부를만한 경영자가 없다는 거다.
우리가 흔히 카리스마 라고 하면 생각하는 이미지 -
즉 허재 감독같은 이미지? ^^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같은 이미지?
러시아의 뉴 짜르 행세를 하는 푸틴같은 이미지?
그러나 비전기업의 오너들의 경우엔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내성적이고 사려깊고 온순하고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한 성품의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많다고 한다.
우리는 예술을 다소 추상적으로 접근한다.
예술적인 면에서 역시, 이런 카리스마에 대한 오해가 드러난다.
흔히들
특출난 재능을 가진, 특출한 카리스마를 가진 예술가가 성공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연기란 작은 것을 찾는 거란 말.
연기과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항상 해왔던 말인데
연기란 정말 작은 것을 찾는 일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작은 것을 찾는 것이다.
입시를 하다보면
영화과의 경우를 예로들면 -
사실, 영상에 대해 엄청난 실적이 있거나, 탁월한 경력이 있거나
영화에 대해 엄청난 지식을 갖고 있거나
또는 예술적인 개성이 특출나거나
그런 학생들이 합격하는 경우가
내 주변엔 거의 없었다.
올해 우리 학원에서만 한예종 영화과가 총 10명이 합격했으니 어느 정도 객관적 데이터가 될만한데
영상에 대한 특출난 지식이나, 선행학습이나, 또는 경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하기위해 영화를 공부해야 하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과 입시를 자세히 뜯어보면
1차 언어, 영어, 그리고 논술
2차 스토리텔링, 몇몇 기발한 문제들, 면접, 자소서
모든 입시과정이
상당히
지원자의 꼼꼼하고 체계적인 준비를 요구하고 있다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흔히 한예종 입시를 생각할 때
어떤 천재가 아무생각없이
이상한 수수께기 같은 문제를 독창적으로 풀어서
천재적으로 합격하는
그런식의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절대 아니다.
영어는 매우 평이해서, 고등학교 영어과정을 충실하게 수강한 학생이라면 고득점할 수 있도록 무난하게 나오며
언어는 난이도가 그래도 꽤 있는 편인데, 체계적이고 꼼꼼하게 사고하고 사유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논술 역시 지난 3년동안 처럼, 논술형 문제로 나오든
올해처럼 글쓰기 형태로 나오든
어찌됐건, 한예종 입시의 근간은 - 폭넓은 독서와 깊이있는 사고력.
한마디로
차분하고 밀도있게 사유하고 훈련하고
작은 집중을
남보다 더 깊이있게 한 학생이 결과를 입시라는거다.
남보다 더 예민한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성공, 나의 야망 만큼이나, 사회시스템과 세상의 조화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건 기본이다.
영화 잘 찍고,
영화에 대해 천재적으로 박식하거나
영화에 대한 책 안 읽은게 없고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영화에 대해 관심있는 학생들
많다.
그러나 아쉽게도
1차에서
꼼꼼하게 준비하질 않기 때문에
1차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래서 2차에 가보면
생각보다 모범생들이 많다.
공부를 잘하고, 책임감있고 꼼꼼하고 진중한 성격의 학생들이 대부분이란 거다.
그리고 2차에선
영화적 경력 자체도 많이 보지만 (없는 것보다는 있는게 당연히 낫다)
보다 다채로운 삶의 경력들을 존중해주는 편이다.
그 어떤 삶의 경험이라도
그것은 모두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경험 자체의 질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사유하고, 예술적 영감을 이끌어내는
사유의
질적인 측면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분야의 카리스마가 아님 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
1. 자기고립은 카리스마가 아니다.
흔히 예술가라고 하면, 우수에 차 있고
무언가 세상과 부조화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모습. 즉 소통불가의 천재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카리스마에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부분이 이 부분이다.
자기고립은
예술에서 죽음을 의미한다.
예술가는 세상과 소통해야 하고, 사회와 소통해야 한다.
왜. 예술이 꼭 사회와 소통해야 하는가?
나는 그냥 나만의 개성있는 이야기를 나 스스로 만족하는 자기위안적 예술이 좋다
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맞다.
그것도 예술이다.
나는 그 주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소통의 소재는
사실 상관없다.
나는 지금
너의 컨텐츠에 대해 규정짓는게 아니다.
에어리언이 둘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써도 상관없고
너의 일기를 부두교 주문으로 만들어 랩과 함께 붓글씨를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어떤 소재를 다루더라도, 너의 이야기는 세상과 소통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다.
일기에 불과하다.
예술은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거다.
그러나
자기만족을 넘어 자기자랑이 될때 우리는 그걸 예술이라 부른다.
예술이란 곧 자기자랑 하는거다.
여기서 자기자랑이란 곧 형식을 의미한다.
서예가는 서예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이라는 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발레 안무가는 발레란 형식을 통해 표현한다.
이러한 형식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예술이란 논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현대연극사에서 폴란드의 연극혁명가 예르지 그로토프스키의 영향은 지배적인데
그의 가난한 연극 이론의 핵심은
연극예술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대체불가능한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남겨진 대체불가능한 요소는
결국
배우과 관객이다.
이를 예술전반에 걸쳐 확대시켜보면,
결국 예술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되는 요소가
바로
창작하는 자와
수용하는 자
둘의 관계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고립적인 예술은
수용자를 고려하지 않는 죽은 예술이다.
혼자 즐기는 예술이라 하더라도 수용자는 존재한다.
바로 자기자신이 된다.
그러므로 자기위안적인 작품은
실제론
자기기만인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건
예술에서 고립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공부하고, 조금만 더 사회와 예술에 대해 이해하려고 해도
자신의 세계가 매우 초라한 우물 안 개구리 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만의 세계에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필연적으로 외부로 눈을 돌려야 한다.
자연과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추상적 관념세계와
인간의 종교와
현재 사회의 구조와 삶의 현실에 대한
치명적 관통이
필요한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내부인 나의 자아에서 시작해서 외부 환경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
즉
외부에 대한 인식과 관찰과 경험과 자극과 상처와 분노와 때로운 공감과 깨달음에서
내부의
나
를 들여다보는
형식적 준거를 마련하는 것이
예술작업을 조금 더 가깝게 설명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몇년도 수상작인지는 모르겠는데
깐느영화제 단편부분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으로 '생명수'라는 작품이 있는데
서울예대 방송영상학과 영상분석 문제에 몇번 기출된 적이 있어
나도 수업중에 자세히 봤는데
매우 공감하면서 봤다.
작품은
한 부유한 레스토랑에서
온갖 매너는 다 지키며
식사를 한다.
그리고 중년의 웨이터가 매너좋게
몇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
손님들에게 선택하게 한다.
나이대, 성별 등이 다양한 사람들 중
젊은 남자를 손님이 선택하자.
곧
그 남자는 벌거벗거져 거대한 수족관 속에 감금된다.
그리고 점점 물이 차오르고
죽어가는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즐겁게 식사를 한다.
배경으로 흐르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교차편집되는
수족관 속에서의 죽음이
아주 강렬한 메타포를 발생한다.
드라마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손님 중 한 여자가
고통스러워 하며 익사직전에 간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웨이터에게
항의를 한다.
그러나 중년의 웨이터는 본색을 드러내 여자를 위협한다.
격투 끝에 실수로 여자는 웨이터를 식사용 나이프로 죽이게 되고
그녀는 샴페인 병으로 수족관을 깨서
익사직전의 남자를 구출한다.
수족관이 깨지면서 알몸이 된 남자와, 유리파편과, 물과, 여자가 함께
레스토랑으로 미끌어져 들어오는 장면이 아주 압권이다.
라스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데
그 심각한 동요에
잠깐 식사를 멈추었던 레스토랑 손님들은
이내
모두 기립하여
박수를 친다.
마치
즐거운 쑈를 한 편 잘 보았다는 듯이 -
영상분석에 대해 고민이 많을텐데
실제 서울예대 방영과에 기출된 칸 영화제 수상작 생명수야말로
영상분석에 큰 도움이 되니 꼭 한번 보도록 (유투브에 있다)
그외에 짐 자무쉬,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등의 10분짜리 단편이 연작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텐 미니츠
등을 영상분석을 위한 교재로 적극 추천한다.
<생명수>의 경우
결국 수족관에서 죽어가는 남자와
그걸 배경삼아 매너를 갖추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의
계층적 질서 = 즉 자본주의적 클래스에 대한
강렬한 메타포이다.
자본주의적 계층구조의 특징은
그 구조 안에서는
매우 젠틀하다는 것이고
실제적 요소는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편의점을 착취하고, 가입위약금등을 볼모로 기업이 작은 편의점 사장들에게 매일 몇백만원이 되는 돈을 착취해도
독립사업자인 편의점 주인들은 본인의 사업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본인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남양유업의 최근 문제도 마찬가지다.
택배회사도, 택시회사도, 버스운송회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시스템은
외부에는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축구공을 만들기위해 동남아의 아이들이 착취당하는 것이나
사랑의 증표인 다이아몬드의 이권을 둘러싸고
아프리카에선 살인과 착취와 무시무시한 인권유린이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계층을 끊임없이 나누며
그 계층 안에서는
매우 잰틀하다.
레스토랑은 그런 가식적인 호의와 자본주의의 수혜를 받는 특권층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수> 에서 묘사되듯,
레스토랑의 문을 열면 회색 먼지 날리는 차가운 바람에 거지꼴을 한 가족이 벌벌 떨며 일자리를 동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실제적 고통이 은폐되어 있기에
적극적 관심을 갖지 않으면
문제에 대해 인지조차 할 수가 없다.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는 것이다.
<생명수>는 이런 자본주의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는데
특히 늙은 웨이터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웨이터는 그들 계층에 속한 이들에게는 매우 우호적이고 젠틀하지만
계층에 대해 위협이 될 경우
즉각적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정말 동의되지 않는가?
오늘날 자본주의 하에서
권력의 수호자들이 있다.
그 계층에 속하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지만
관점이 다르고,
계층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우리는 흔히 봐왔다.
철거민들에 대한 정부기관의 용역깡패 동원이라든지
또는 법적, 제도적,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최근의 철도노조 대량해고 및 불법해고에 대한 민/형사상의 고소
등이
바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생명수>는 그런 오늘날 사회의 모습을
매우 분명하고
뚜렷한 상징적 메타포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생명의 물 (레스토랑에서 마시는 물) 이
누군가에겐 죽음의 물 (수족관에서 죽어갈 때의 물)이 된다.
누군가에겐 사랑의 증표인 다이아몬드가
대륙건너 아프리카에선 죽음의 상징이 된다.
영화 <생명수>가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라스트씬에 있다.
한 여자가 목숨을 걸고 수족관에 있는 남자를 구해주지만
(바로 여러분이 예술을 하겠다면, 저 여인이 되어야 한다)
레스토랑에 있는 사람들은
일련의 사태를 보고
오히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한다.
마치 즐거운 쑈를 본 것처럼.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CNN 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정치적 억압과 대항하는 시민들과
이를 분쇄하는 정부측 군대의 교전이나
또는 이라크에 폭탄을 떨꾸는 미군의 모습을 실황중계하며
그래픽자료로
어떤 미사일이 쓰였는지, 그 미사일이 어떤 폭팔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분석/ 자료화해서
마치 게임 아이템 설명하듯이 보여주는 장면.
그리고
이라크나 이스라엘에서 교전이 벌어지는 현장을 생중계하며
마치
액션영화의 한 장면이나
즐거운 불꽃놀이를 보듯이
중계하는 CNN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생명수>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방송의 기만적 구조에 대해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예대 방송영상학과에 이 문제가 기출된거라 볼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시대의 언론, 방송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지는지를
매우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는 라스트씬은 과연 칸느 영화제 최수우단편부분을 수상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엔 아마, 마지막 방송에 대한 상징까지 읽을 수 있는 학생이었다면
서울예대 그 해 입시에서 무난히 합격하지 않았을까 한다.
2. 성격적인 면은 카리스마와 전혀 상관이 없다.
예상 외로, 성격적인 면은 예술적 카리스마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 말하므로
격정적 사람이 격정적으로 창작하듯
내성적인 사람이 격정적으로 창작하듯
아무 상관없다.
실제로 매우 거친 성격의 사람이
섬세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도 많이 봤고
호탕한 성격의 사람좋은 사람이
지극히 사이코틱한 작품을 만들 수도 있다.
창작자의 삶과
창작자의 작품은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 -> 작품 이 아니라
작품을 먼저 보고, 그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삶과 실제모습을 비교분석하는 것은 가능하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을 가지고 그 사람의 작품을 평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의 카리스마란
리더십도 아니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시키는 진행능력도 아니며
독설과 세상에 대한 분노에 가득찬 공격성도 아니다.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
그 내면엔 거대한 분노와 폭팔적 에너지를 가질 수가 있고
종교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그 속엔 비도덕적이고 사회의 금지를 무참히 넘나드는 주제를
탐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입증하는 능력이 곧 카리스마다.
그렇다면, 예술가에게 있어 카리스마란 무엇일까?
우선 예술가는 작품을 통해 말해야 하고
두번째로
그는 그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형식적 특색을 통해
우리는 예술가의 카리스마를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이창동 감독의 실제성격은 흔히 말하는 카리스마, 특히 제왕적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카리스마적이다.
세상을 칼로 해부하듯, 죽은 동물의 사체를 찢어 발기는 하이에나처럼
공격적으로 현실의 부조화를 탐구한다. (대표적으로 밀양)
피카소는 실제 그의 삶이 카리스마 있기도 하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형식적으로 입증했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회화에서 공간을 이탈시킴)
그는 예술적으로 카리스마 있는 존재인 것이다.
4. 술자리에서 목소리 큰 것, 비도덕적인 삶은 특히나 카리스마가 아니다. 자기절제가 되지않는 예술가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술자리에서 목소리크고
특히 예술에 대해, 인생에 대해 목소리 크게 내지르며 내 잘났다고 외치는 사람치고
실제 작업에서 날카롭게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사람. 별로 없다.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형식적 특성등은
치밀한 연구와
집념
그리고 자기 절제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도덕적인 삶이
예술가에게 면죄부가 될수도 없다.
특히
내가 보기에 일부 대학에서의 도덕적 해이가
예술이란 이름으로 마치 그게 예술적 삶인 것 처럼
집체적으로 강요되고 있는데 (강제로 술자리에 참석하게 한다든지, 교내에서 집합시키면서 선배가 후배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행태들)
매우 우려한다.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지는 중요한게 아니다.
도덕적이어도 작품이 엉망이면 안되고
비도덕적이어도 작품이 좋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비도덕적 삶이 곧 예술적 자긍심인 것처럼 오도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한국적 괴기한 예술문화를 따르느라 (군대문화와 사회적 병폐가 혼합된 한국 예술교육 현장만의 어처구니없는 문화)
정작
제대로 된 예술적 형식을 익히고
세상과 사회에 대한
균형잡힌 관찰과 사유를 이끌어낼
절대적 훈련의 기회를
얻어야만 하는 대학생활을
비본질적인 폼 때문에
본질을 놓쳐서는
미래가 없다.
너의 미래를 선배가 책임져주는거 아니고
너의 미래를 교수가 책임져주는것도 아님을
기억하는게 좋을거다.
오만함도 예술적 카리스마가 아니며
독특한 외적 개성, 외적 스타일, 패션의 특이함 등도
예술적 카리스마와는 별 상관없다.
결국, 너의 미래는 술자리에서가 아니라, 군기 잡는 현장에서가 아니라
도서관에서
작업실에서
그리고 작업현장에서
결정되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특출난 재능 아니다.
섬세하고 구체적이고 진실된
영혼이
엄격하게 훈련되어질때
비로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혹독하게 훈련하면 할수록
자유로와지는 신비한 세계가
바로 예술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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