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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은 철학수업 이후...연극영화과에 대해 말하다 2013. 3. 26. 05:07
오늘 철학수업을 하면서
(망했다. 미안하다. 준비를 이틀동안 했는데 나는 학생들에게 차분하게 텍스트를 읽어주고 싶었다. 텍스트를 읽는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고, 전체 텍스트를 꼼꼼히 짚어주고 싶었다. 내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매우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학생들은 책 읽기보다는, 강의로 장악하는 것을 원하는듯 하다. 다음주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룹 토론방식으로 확실하게 이끌겠다. 철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적 재미가 떨어지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철학자들이 감각적 유희를 넘어선 더 깊은 세계의 유혹을 말하고 있건만...^^)
내용을 봤더니 흥미로운게 있었다.
샤르트르의 구토와 같이
문학속에서
주체성을 찾은 자는
예술속에서
광기, 혹은 문제적 인간으로 그려진다고 한다.
흥미로웠다.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결국
회의하기 위해 회의적인 것이 아니다.
회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회의를 통해
더 예리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성적 통찰을 얻기 위함이다.
데카르트의 회의론은
결국
더 이성적인 통찰을 얻기위한 방법론적 회의론인 것이다.
마찬가지다.
예술작품에서
아방가르드는
리얼리티를 깨부수지만
그것은 어쩌면 더 예리한 리얼리티의 증거일 수 있다.
리얼리티를 결국 양식적 리얼리티가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식론적 리얼리티가 아닐까?
예를들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형식적, 양식적으로는 사실주의를 조롱하지만
어디서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간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추구하고
그 추구하는 자체로
맹렬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는
어떤 리얼리티 양식의 문학보다도 강렬한 리얼리티를 작품 속에서 느꼈다.
결국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리얼리티를 느꼈다는게
오해는 아닌 것이다.
친구들아.
위의 샤르트르와 데카르트의 예를 든 이유는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아방가르드의
지독한 혐오와 극단적 행동과
흔히 말하는 폐병환자와 같은
예술적 극단이
그렇게 가벼운
데카당트한 것만이 아니란 것이다.
한마디로
예술의 극단적 아방가르드함의 기저엔
진지한 통찰과
깊은 이해
그리고 예리한 이성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술을 한다고 하면서
그 치열한 두뇌와
예리한 지성과
섬세한 관찰과
훈련은 없이
예술적 폼만 잡고 있지는 않은가
예술적 극단만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말이다.
방종과
아방가르드는
달라도 한참 다른 것이다.
쌍팔년도 예술론을 버려야 한다.
예술가는 가난하다.
예술을 하면 배고프고 무능하고
폐병환자처럼 콜록거리며 어두운 지하실에서 살아야 한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TED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현대는
예술과 과학과 경영의 구분과 경계가
점차 희미해져 가는 시대이다.
결국
현실과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가상이 현실을 압도할 수도 있는 시대를 살면서
예술이 어디까지인지를
특히, 순수예술과 상업예술,
예술가의 삶의 영역을
쌍팔년도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나는
예술가들이
결국
최고의 경영자가 될 것이라 믿는다.
미래에도
물론 엘리트들은 있으며
검사나 판사가 사회적으로 여전히 힘이 있겠지만,
대기업 임원이 여전히 힘이 있겠지만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최정상의 위치에는
결국
예술과 과학과 경영의 컨버전스를 이루는
예지력있는 크리에이터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고 믿는다.
앞서 자주 언급했지만 손정의나, 스티븐 잡스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델피의 신전의 예지자 oracle은
신탁을 내리곤 했다.
오늘날과 같은 컨버전스의 시대를 살면서
예술가는
일종의 신탁을 내리는 예지자가 아닌가 한다.
불교가 예술에 투영될 때
흔히 거울의 비유를 많이 쓴다.
백남준의 걸작, 'TV부처'가 그렇다.
(백남준, TV부처)
거울은
투명하고 깨끗하며
편견이 없이 모든 사물을 스쳐 지나가게 하며
자신의 자아에 대한 편견조차 없이
존재한다.
거울은
존재론적이다.
불교는
이 세상은 모두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그리고
모든 인간들은 영원과 자아의 굴레를 지고 살아가며
탐심이
고통을 잉태하므로
인생은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모든 고통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고통에서 벗어날 힘도
마음에서 나오는 법.
결국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결국 위의 컨버전스 목록에
종교도 추가해야 한다.
예술-과학-경영- 그리고 심지어는 종교도
이젠 통합된다.
따로 떨어지지 않고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통합적인 관점을 가진
예술가가 절실하다.
쌍팔년도 예술론으로
감독은 어때야되고
배우는 어때야되고...
순수예술은 어떻고
난 순수예술을 하고
넌 상업예술을 하니 타락했고
넌 예술가가 돈을 밝히니 쓰레기고
난 가족들이 굶어죽어도 예술하니까 멋지다는
그런
이분법적이고 자기학대적인 예술론은
이제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학생들이 내게 묻는다.
예술을 하면 진로가 어떠냐고?
한예종 나오면 뭐하냐고...
참 난감한 질문이다.
이미 질문이 많은 걸 상정하고 있다.
생각이 좁고
이분법적이라는 걸 말이다.
진로가 무엇이라고 하면
그대로 되는게 인생일까?
내가 뭐가 된다고 하면
그대로 되는 것일까?
미야모토 무사시는 검술에서
상대방에게 칼을 휘두르기 전에
생각하면
이미 진다고 한다.
적의 칼날을 생각하면
생각이란
멈춤이므로
적의 칼날을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 자체가
멈춰버린 기준에 서 있으므로
이미 늦어버린 것이다.
칼과 나의 인식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면
미야모토 무사시의 말처럼
우린
이미 늦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예술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사람들이 원하는 통찰을
흘러보낼 수 있을 것이다.
델피 신전의 예언자. oracle처럼 말이다. 오이디푸스의 테레시아스처럼.
무엇이 되려고 하지말고
존재해야 한다.
예술가가 되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말고,
예술가가 되려고 하지말고,
무엇이 되려고 하지말고,
존재해야 한다.
doing의 삶에서 being의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니. 이것 조차도 되어야 함이란 표현을 빼 버리고 싶다^^
예술가가 되어서
넌 뭘 할건가?
우리는 예술적 창작행위를
예술가가 되고 난 다음에 하려고 한다.
질문하고 싶다.
예술가는 어떻게 하면 '되는'건가?
한예종을 나오면 예술가가 되는건가?
아니다.
한예종을 나와도 예술을 안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한예종은 예술가가되는 하나의 길은 될 수 있을지언정
'되는'것을 보장해주는 어떤 기준은 아니다.
그런 기준은 애초에 없다.
산다는게 예술한다는거다.
네가 무언가가 되기위해 예술을 선택했다면
무언가를 오해한 것이다.
산다는게 곧 예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맥루한의 말 중에
미디어는 메세지다 라는 말이 있다.
너 자체도 일종의 미디어라고 한다면
너의 삶
그 자체가
너의 메세지이다.
네가 살아가는 모습
네가 표현하는 일상
네가 하는 말과 행동 모두가
세상에
크던 작던 영향을 주기에
너는 이미
예술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주체성이 중요하다.
너의 주체와
너의 개성과
너의 확신이 없이
교육에 의지하고
무언가를 배워야만되고
무언가 교육받아야 하고
어떤 대학을 나와야하고
어떤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비주체적인 것이며
이미 한참 늦은 것이다.
결론은
'놀자'는 거다.
한예종이 참 좋아하는 말.
놀자 라는 말.
우린 그냥 놀면 되는거다.
놀되
예술적으로 놀아보는 거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놀아보자는거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게
바로 창작하고 나를 무언가를 통해 표현하는 일이다.
블로그를 이렇게 써대는게
재미있어서이다.
나는 글을 쓸때
존재적인 일치를 느낀다.
그리고
무척
신난다 ^^
그렇게 예술을 가지고 노는 애들이
결국 성공하는 예술가가될 것이다.
입시도 그렇다.
예술을 통해 무얼 하려는 애들을 뽑는게 아니라,
예술적으로 노는 애들을 뽑는다.
영화를 좋아하는 애들을 뽑는게 아니라
영화를 갖고 노는 애들을 뽑는다.
영화를 하고 싶어하는 애들을 뽑는게 아니라
영화적으로 노는 애들을 뽑는다.
영화를 통해 무얼 하려는 애들을 뽑는게 아니라
영화를 통해 노는 애들을 뽑는다.
바보같은 철학수업을
나는 꾸준히 할 것이다.
비록 재미없지만,
창작의 근원은
독서와 생각에서 나온다.
우리는 창작이 허공에서 갑자기 딱 하고 튀어나올걸로 생각하지만
진짜 창작은
거의 모두 원형적 사고에 대한 깊이있는 인식에서 나온다.
기독교 문화, 그리스의 헬라문화, 불교 등등
백남준의 작품들을 보라.
그리고 매트릭스와 같은 영화나 아바타를 보라.
'원형'들은
크리에이티브의 씨앗과 같은 것이다.
고전들은
크리에이티브의 씨앗이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그 자체이다.
창조적인 능력은
결국
적용능력인 것이다.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유명한 작가에게 수업을 들을때
그는 내게
자신은 처음 써온 글로 학생의 재능을 평가하지 않고,
학생이 퇴고해왔을 때 진짜 재능을 본다고 했다.
퇴고가 진짜 재능이라는거다.
마찬가지로
진짜 크리에이티브한 생각은
원형과 고전에 대한 응용에서 나온다.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예언은
밑에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쏱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아.
예언자가 되어라.
이 시대의 oracle 이 되자.
델피 신정의 제사장처럼
세상을 바꾸는 무시무시한 혁신의 길을 가자.
쌍팔년도 예술론은 죽었다.
이 시대 예술은
폐병환자가 아니라
스티븐잡스가 하고 있다.
함께 이 길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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