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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기준연극영화과에 대해 말하다 2012. 7. 13. 14:04
주변을 보면
특히 요즘 학생들을 보면 (33살에 불과한 나도 요즘 학생이지만)
한가지 해주고 싶은 말이있다.
권위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권위를 존중받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인정 받는다.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교육에서 가장 잘못된 것이
바로 권위에 대한 존중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과
무거운 냉소와
비아냥거림만 남았다.
그렇게 만든 1차적 책임은
기성세대들에게 있다.
나도 싫다.
정말이다.
내가 연영과 생활을 오래 했고, ( 98학번이니까 )
평론가협회에서도 2년 넘게 활동했으니까...
짭밥이 얼마나 된줄 알겠냐?
그 시간을 지나면서
예술을 가르친다는 교수들의 부조리를 얼마나 많이 봤겠냐.
교수라는 직업 자체가
그 사람을 죽인다.
그 사람의 예술을 죽인다.
교수가 되어서도 작품 활동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 예술가라고 봐도 된다.
너희들이 상상도 못하는 별의 별 상황들...부조리들...
다 보고 듣고 겪고나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
기성세대가 잘못되었다고해서
우리가 물러나서
그저 냉소와 비판만 쏟아내서야 되겠는가?
결국
그 society에 들어가서
뿌리부터 우리가 바꿔야하는것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권력과 힘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때
(즉 우리가 힘을 갖게되었을때)
비겁하게 내 뱃속을 채우고
내 몫을 채우고
기성세대처럼 허영에 쩔지 않고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용기있는 사람이 아닌가,,,
택시를 타면
택시기사가 권위자이다.
건물 지하실로 내려가면
수위아저씨가 권위자이다.
권위자를 존중하고
어느 곳에서든 내가 배울 곳이 있다는 자세로
최대한 존중하고
몸을 낮추다가도
내게 권력이 주어지고
내게 힘이 주어지고
내게 더 많이 긁어모아도 충분한
조금 더 뜯어내도 충분한
기회와 능력과 상황도 기성의 전통이 있을 때.
그 때.
오히려
내 권력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내 힘을 사용해
시스템을 바꾸고
혁신을 추구하고
공생과 나눔을 추구하는 것이
진짜 용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뒤에 숨어서 비난만 하는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기성세대를 욕하면서도
조그만 이익만 주어져도
쉽게 원칙을 타협해버리는 나약한 젊음을 너무 많이 봤다.
너도 나도, 그렇게는 살지 말자.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인정하겠지만
내 곁에는 성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걸 자랑하려는게 아니라
내가 경험한 삶의 원칙을 말해주려고 하는거다.
네가 성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성공한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친구야.
네가 정말 불세출의 위인. 나폴레옹이 아니고서야
네가 성공하기위해선
성공한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공한 이들은 의외로 너를 돕고 싶어한다.
정말이다.
그러나
보통 두가지 경우때문에
돕고 싶어도 못 돕는다.
그런데 웃긴건, 이 두가지에 해당되지 않는 젊은 사람을 참 찾기 어렵다.
반대로 말하면
이 두가지 경우만 피할 수 있으면
네 주변엔 성공한 사람들의 도움이 끊이지 않을 것이란 말이 된다.
첫번째는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이다.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
피해의식
열등감.
그리고 분노가
많은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나 이런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일수록
자신보다 조금만 못한 사람에게는
가혹하다.
학벌놀이하는 학력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학생일수록
자신보다 조금만 높은 레벨의 학교앞에 지나치게 기죽고
조금만 덜 유명한 대학을 보면 지잡대라고 욕하지 않는가.
열등감과 우월의식은 똑같은거다. 전혀 다른게 아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은
반드시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함으로서 자신의 열등감에 대한 보상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과 냉소는
성공한 사람들과의 교류 자체를 막는 요소다.
그러면
앞서말한 성공의 원칙에서 논리적으로 어긋나게 된다.
성공은 성공을 낳고
성공하기 위해선 성공한 이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전제조건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진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을 못봤다.
자석의 양 극단처럼
성공의 정당한 기회들을 밀쳐버리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앞에서는 밝은척하지만
뒤에서는 상사와 회사에 대한 냉소를 가진 사람들이
직장에서 성공할 것 같은가?
상사는 바보가 아니다.
네가 상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비판하고 어떻게 욕하는지를
알 수 있는
네가 모르는
루트가
매우 많다.
100%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
알면서도 모른척할 뿐이지.
그리고
상사도 기회적으로 너를 대하는 것이다.
지금은 쓸모가 있으니
최대한 뽑아먹고
기회가 되면
효용이 다하면
내치려고 할 것이다.
아직 그 효용이 다하지 않았기에
모른척하고 있을 뿐이다.
정말이다.
상사는 네가 상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네가 모르는
수많은 루트를 가지고 있다.
그게 그 상사가
직장생활을 수십년하면서
익힌
거의 유일한 노하우이기 때문이다.
군생활을 떠올리면 쉽다.
후임병의 머릿속을 헤아릴수 있는
수천수백만가지의 루트를
고참이 알고있는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성공한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고 멀리하고 적대시하는 것은
반드시 칼날이 되어 네게 돌아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두번째의 경우도 매우 큰 문제이다.
성공하기 위해선 성공한 사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언제나 그 기회를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경우다.
지나치게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아부하고 굴종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굴종적인 태도를 가지고는
역설적으로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친구는 동등할때 이뤄지는 것이지
한 쪽의 균형추가 무너져서는
그 관계는 건강할 수 없고
오래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와 사람은 친구 먹을 수 없다.
성공한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은 가식과 아첨속에
지쳐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의 반열에 들 정도하면
지금 저 사람이 진심으로 자신을 아끼는지
아니면 무엇인가 기회를 얻으려고
옆에서 알짱거리는줄
비교적 정확하게 분별해낸다.
그런 분별이 정확하니까
성공한 거다.
그런 분별이 없는 사람은
성공하지를 못한다.
아첨을 들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아첨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첨하는 사람의 온갖 아첨은 다 받아먹지만
생각해보라.
아첨한다는 것은
결국 기회에 따라 돌변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생팬이 등을 돌리면
가장 강력한 안티팬이 된다.
지금 저 사람이 내 앞에서 아첨하고 있지만
언젠가 상황이 돌변하면
저 사람이 반드시 나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네 앞에서 알랑대는 너의 아첨에
깊은 감동을 받지 않는다.
그런 아첨으로서는 진실된 소통이 있을수 없다.
그저 적당한 선에서 너를 이용해 먹고 있는 것이다.
역시나 효용이 다하면
미련없이 bye할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무조건적으로 적대해서도 안되고
아부해서도 안된다.
성공한 사람들 앞에서 적대하지도 아부하지도 않고
당당하고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것이 청년인 우리에게 가능할까?
그것은 두가지 경우에만 가능하다.
첫번째는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메이져리그 2할8푼 타자라면
3할5푼 타자와 친구먹을 수 있다.
아. 너 야구 좀 하는구나...
그래도 나도 정말 열심히 하면 너 정도는 할 수 있지...
당당하게 대할 수 있다.
레알 마드리드에선
호나우도와 코엔트랑이 친구먹을 수 있다.
맨유에선
호나우도와 박지성 역시 친구먹을 수 있다.
너 호나우도냐?
정말 유명한 세계최고의 축구선수구나.
그래도 뭐...박지성이라면
친구먹을 수 있다.
충분하다.
비슷한 레벨이라면 내가 조금 덜 성공해도 조금 더 성공한 사람과
친구먹을 수 있다.
실력을 갖추는 것.
가장 손쉽고
당당해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러나
누군들 실력을 못 갖추고 싶어 못 갖추나.
누군들 축구를 시작해서 맨유에 입단을 안하고 싶어서 못하나
국가대표에 뽑히기 싫어서 안 안들어가나...
안 뽑아주니까 문제지.
그렇지 않은가?
실력을 갖추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못 갖추니 문제인 것이다.
자.
이제 결론을 말하려 한다.
진짜
당당해지는 것은
그런데
의외로 실력여하에 있지 않을수도 있다.
아니.
진짜 당당함은
오히려 실력과는 상관없다.
당당함이
실력에 좌우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비참한가...
나같이 별볼일 없는 사람은
어쩌라고 ^^
오직 실력만이 우리 삶을 결정하는 기준이라면
그 인생 혹독해서 어떻게 살아갈까?
만약 실력에 따라서 네 당당함이 좌우된다면
네가 실력을 잃어버리면?
네가 호나우도급의 선수였다가
부상당해서 은퇴해야되면
너는 이제부턴 당당해질 수 없는 것인가?
그런건가?
진짜 당당함은
무엇에서 오는가.
그것은 '가치'에서 온다.
내가 무엇을 가치있게 여기느냐에 따라서
나의 당당함이 결정된다.
그리고
더 큰 가치를 가질 수록
작은 가치는 우스워진다.
정말이다.
어릴때 나는 싸움을 못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께 빌었다.
싸움 좀 잘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학교 짱 먹어보고 싶다고...
그땐 가치수준이 그것밖에 안되었던거다.
반에서 싸움으로 짱먹는 것.
지금 내게 누군가가
반에서 짱 먹는 싸움실력을 가질래?
돈 100만원을 가질래? 그러면
나는 현금 100만원을 선택할 것이다.
50만원도 좋고 10만원도 좋다.
그깟 반에서 짱먹어서 뭐하냐?
괜히 때렸다가 피해보상이나 해줘야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현금 10만원이 낫지.
가치수준이 변한 것이다.
더 좋은 가치.
더 소중한 가치.
더 절실한 가치가
생긴 것이다.
가치도 수준이 있는거다.
가치에도 수준이 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수준이 있는가는
그 사람이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얼마나 많이 가진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가치수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거다.
가치수준이 변하면
삶과 사람을 대하는 수준이 달라진다.
기준도 달라진다.
가치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네가
그깟 외제차가 가치기준이면
외제차를 가진 놈앞에선 비굴해지고
안 가진 놈은 무시하려 들 것이다.
학벌이 가치기준이면
학벌에 종속될 것이다.
부유함이 가치기준이면...
유명함이 가치기준이면...
외모가 가치기준이면...
돈이 가치기준이면...
결론은 이것이다.
당당해지기 위해서.
정말 성공하기 위해선
시급히
너의 가치기준을 바꿔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가치기준을 바꾸는 것.
또는
가치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
새벽에 지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누가 법에 대해서 참 잘 아는거다.
그래서 내가 또 철없이
변호사냐고 물어봤더니
그 사람이 그러더라...
아...아닙니다. 변호사는 아니고... 판사 조금...
지금 생각해도
그 표현이 너무 웃긴다.
판사 조금.
그런데 난 뭐 그 사람이 판사라고 하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공부 열심히 했구나...
뭐 그 정도?
그 사람은 뭐 판사지 뭐...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구나. 그 정도에서 그쳤다. 더 할것도 없고, 덜 할것도 없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판사보다 더 높은 사람도 많이 만나봤다.
지인중에 더 훌륭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딱 그 뿐이다.
성공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하지만
존경하는 건
내 가치기준에선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성공이
그 사람의 인격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사람은 정말로 다 평등하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하겠냐?
돈 많은 사람은 자식들 때문에 고생안하나?
재벌이라고 고민없나?
아무리 돈이 많아도
눈에 티끌하나 들어가면 그 고통때문에 다른 모든 것은 부차적인게
우리 인생이지 않은가.
김정일도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더라 ^.^
가치기준이 바뀌기 위해서는
더 큰 가치를 만나야 한다.
예술을 하려고 하는 친구라면, 예술이 그 멋진 가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
그것은 내게 참 큰 가치를 주더라.
당당함을 주더라.
네가 예술을 한다면
정말 멋진 가치를 만난 것이다.
축하한다.
예술가는 당당하다.
누구보다 뒤지지 않는다.
판사보다도
재벌보다도
누구보다도
멋있는게 예술가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세상에서 예술가가 제일 멋있다고.
예술이 너의 가치가 되기에
네가 이 블로그에서 이 글을 읽고 있겠지.
그렇다면
예술을 하는 너 자신을
당당하게 생각하라.
정당한 가치를
너 자신에게 줘라.
넌 예술을 하잖아?
그러면 된거다.
참 멋진거다.
정말 나이스한 가치를 만난거다.
그리고
내게 있어 또 다른 가치는 바로 믿음이다.
나는 가장 큰 가치를 믿음에서 찾았다.
그러니까
다른 모든 가치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레슨 포 케이아트를 운영하는데
까짓 뭐 학원 망하면 뭐
좋지 뭐.
지방에 가서 인형눈알 붙이고 살아도
책읽고
자연과 함께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면
그게 행복아닐까? ^^
난 진짜 고생해봤는데...
(지난 블로그 글들에서 너무 구구절절히 쓴것 같아 좀 부끄럽다. 삭제할수도 없고...)
뭐 그래도 난 행복하다.
그리고 난 내 직업과
내 삶을
세상 그 누구와도 바꾸지 않을꺼다.
진짜다.
난 그저 나의 삶이 소중하다. 좋다. 기쁘다...
코스모스의 색깔이
저마다 깊이와 색채와 색감이 다른 것처럼
나만의 것이기에
그것이 좀 못낫어도
그대로 참 이쁘고
사랑스럽다 ^^
그러니 겁이 없다.
진짜 바닥을 쳐보니까
바닥 별거 아니더라.
바닥에 진창 빠져도
죽는게 아니더라.
바닥에서도
신뢰와 믿음과
또 소중한 사람들만 곁에 있으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더라...
우리는 흔히 못살면 아프리카 아프리카 하잖아?
근데 나 진짜 아프리카 가봤거든.
탄자니아 마사이족과 텐트치고 한달 살아봤거든
(한마디로 죽는줄 알았음. 살이 10키로 빠졌음)
근데 거기도 행복이 있던데?
난 가치가 흔들리는 걸 경험했는데?
내가 행복한건지
움막에 맨뱔로 사는 그들이 행복한건지...
그들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경이로움과
존중과
절대자에 대한
믿음이 있더라구...
비교하니까 힘든 것일 뿐.
그들의 절대가치에선
그들이 충분히 행복하더라구...
긴 글을 이제 마치자.
가치기준에 따라
당당함과
행복이 결정된다.
가치기준이 바로서면
성공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이유들 때문에 !
누구를 만나서도
내 가치기준이 바로 서 있다면
당당할 수 있고
힘있는 자 앞에서 굴종하지 않을 수 있고
힘없는 자를 무시하지 않을 수 있다.
성공은 연애와 비슷한거 같다.
터놓고 연극영화를 언제까지 연재할지는 모르지만
까짓거 될때까지 하는거다.
하다 망하면 안하지 뭐 ^^
사람들은 내가 한예종 한예종 하니까 한예종에 목매단줄 알지만
사실 난 뭐 별로 신경도 안쓴다. 한예종.
다만 지금 내가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는 트렌디한 분야가 한예종이고 입시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입시이기에 입시를 하는거지.
한예종 입시가 나의 가치기준일수는 없다.
학원경영도 나의 가치기준일수는 없다.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다.
언제든지 새로운 도전에
열려있다. 가슴 뛰는 일이 생긴다면 도전할 것이다.
그래서 연극영화관련 포스팅이 한계에 닿으면
그 다음엔 연애이야기, 예술이야기등으로 마음껏 넘나들고 싶다.
그러면 그게 작가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그게 작가지 뭐. 다른게 작가인가?
귀여니도 작가인데 뭐
연애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붙잡으면 놓치고
놓으면 붙잡는 것.
그것이 연애라면
성공도 똑같다.
인생 호락호락하지 않아. 주먹 꽉 쥐고 살아야돼.
그런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주먹 꽉 쥐면 손만 아프지 뭐.
대충 살자.
이게 오늘의 결론이다. 중구난방이라 미안하다.
^^
누가 더 행복할까?
아프리카 아이들과 우리 중에?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중요한건
가치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것 같다.
그리고 그 가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것....
아프리카 사진들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내 시야를 확 틔여준 아프리카...다시 가고 싶다.
난 인생을...뭔가 쌓아올리면서 살고 싶지 않다.
그냥 다 둘러보면서 살고 싶다.
이 넓고 신비롭고
위대한 세상을...
그리고 예술... 그리고 창작...
행복하지 않나? 생각만 해도 !
아프리카에서 끓여먹었던 라면 맛이 너무 그립다. ^^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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