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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어진 꿈은 독이 된다 - 좌절한 이상주의의 선택 '갈매기' (레슨포케이아트,영화입시,영화과입시,한예종극작과, 서사창작과, 한예종연출과,한예종연기과)2015 새로운 포스팅 here!! 2015. 3. 30. 05:46
체홉에 대한 넋두리
처음엔 나도 그랬다.
안톤 체홉의 작품을 읽으면서
등장인물 이름을 파악하는 것부터 힘들었다.
꼬쓰짜는 누구고 콘스탄틴은 누구고 뜨레블레프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세 이름 다 극 중 동일인물 '뜨레쁠레프'를 지칭하는 이름임)
안톤 체홉 작품들 사이에 있는 빈공간도 낯설었다.
주요한 갈등은 일부로 은폐하고 숨기고 엿보고 무관심한
모두가 각자의 난파선 속에 있는 등장인물들은
낯섬, 그 자체였다.
나이가 들고
나이에 따르는 더께가 어깨에 쌓여갈때쯤
몇번의 경험들이 쌓여갈때쯤
드문드문 체홉의 작품을 읽었다.
낯설기만 했던 작품 속 빈공간들에
나의 경험과
나의 기억과
나의 삶이 비집고 들어가면서
안톤 체홉의 작품은
스스로 완성되어 갔다.
안톤 체홉의 작품 중 장막극은, 발표된 순서대로 <갈매기>, <바냐아저씨>, <세자매>, <벚꽃동산>인데
이 4편의 장막극을 관통하는 주제를 말하자면
나는
'좌절한 이상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좌절한 이상주의 란 말에는
승천과 몰락이 공존한다.
더 정확하게는
승천에 대한 갈망과
몰락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맞겠다.
승천이 아니다.
승천은 심형래 영화에서 용가리가 하는거고,
상승욕구.
승천에 대한 갈망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땐
유진 오닐의 <상복이 어울리는 엘렉트라>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이스킬로스의 작품 속 엘렉트라는
애도한다.
그녀는 지하실에 갖힌채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애도만 한다.
유진 오닐이 그 상승욕구를 재발견 해주기 전까지
학문적 작품해석은
엘렉트라의 애도를
아무 의미없는 행위로 치부했다.
그러나
유진 오늘은 엘렉트라의 애도를
새로운 관점으로 보았다.
승천보다
승천에 대한 욕구가
더
깊은 인간에 대한 이해일 수도 있다고.
체홉과 오닐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체홉의 4대 장막극은 모두 공통적으로
좌절한 이상주의에 대해 다룬다.
그러나 그 몰락이
단순히 비관론으로만 읽히지는 않는 이유는
인간을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인간성의 극치가
승천의 순간, 달성의 순간, 성공의 순간이 아니라
그 과정 속
마치, 끊임없이 바위덩이를 올리지만
언제나 다시 처음 밑바닥으로 되돌아가야하는 저주를 받은
시지프의 신화처럼
그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를 언급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인간성의 극치는
어디에 있는가?
쌓아올린 결과물에 있는가?
아니면
승천의 순간을 그리며 영원토록 돌덩어리를 굴리는 시지프처럼
영원한 욕구와 갈증과 그리고 과정 그 자체에 있는가?
꺽어진 꿈은 독이 된다
이 블로그를 쓴지도 5년 가까이가 되어간다.
그동안 참 많은 글을 써왔지만
항상 마음에 짐이 있다.
'꿈을 꾸라'라고 말하는 내가
과연
그 꿈이 꺽어졌을때 상처
때로는 독이 되고마는 좌절의 경험들을 무시할 수 있는가?
함부로 꿈을 꾸라고, 도전하라고 말할만큼
세상이 만만한가?
인간이 선한가?
함부로 뛰어들라고 말할만큼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가?
노력 자체가 과연 판도를 바꿀 요소가 되는가?
좌절된 꿈, 꺽어진 꿈은
치명적 독이 된다.
<갈매기>에서 니나
끝내 모스크바로 가지 못한 <세자매>의 세자매.
벚꽃동산을 지키지못하는 <벚꽃동산>의 귀족들
그리고 한때 인생을 걸만한 이상으로 생각했던 (세레브라코프가 인생을 걸만한 학자라고 생각한) 이상이 꺽어졌을때 권태로움에 몸부림치는 바냐.
꺽어진 꿈 속에서 몸부림치는 이들을 보며
함부로 꿈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꿈꾸라. 도전하라. 노력하라?
지금 20대초 학생들을 보면
오히려 윗세대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고, 훨씬 보수적이고 훨씬 계산적인 걸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젊은세대들은
지극히 냉소적이다.
아마 가장 냉소적인 세대일 거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만큼 더 잔인해지고
그만큼 더 비겁해지고
그만큼 더 치열해진
한국사회 때문일거다.
기성세대들의 위선과 모순.
꿈을 말하는 자들의 이중성 모습 (한비야등으로 대표되는, 또는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개소리)
그리고 꿈마저 착취의 수단으로 삼는 (열정페이같은) 기성세대들의 젊은세대에 대한 잔인한 착취.
이런 것이
지금의 20대들을 움츠리게 만든 이유 아닌가?
한마디로 지금 젊은세대들 냉소는
'좌절한 이상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꺽어진 꿈 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거다.
체홉이 다시금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꺽어진 꿈은 독이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는다.
함부로
순수하게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덫에 발을 내밀었다가
회복할 수 없이 더럽혀진
기억과
경험들만 남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느낀 경험들
젊은 여성이 겪게되는 여러가지 상황들 (예를들어 순수한 연기지망 여학생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홀로 서울로 상경해 기성세대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했을때 그녀가 겪게될 일들을 떠올려보면 쉽다)
패션에 관심많아 패션쪽 일을 시작한 학생들이 현장에서 경험하게 되는 일들 (열정페이)
그런 경험들을 두고
경험이 약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피가되고 살이된다.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상처의 치명적 흔적은
지워지지도 않는데?
결국,
다시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게된다.
그래도
'꿈을 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
이 포스팅은
나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깊은 고민에서
나왔다.
결국 이 질문에 대한 답인 것이다.
꺽어진 꿈에서 현실인식으로
체홉의 세계속에서 항상 의문이 들어왔던 건,
좌절한 이상주의 속에서
왜 주인공들은 아무런 의미없는
현실인식으로 귀결될까?
하는 질문이다.
니나는 지방도시를 떠돌아다니는 3류 여배우가 된다.
순결하고, 고결한 이상을 가졌던 니나가
지방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할때, 천한 상인들의 찝적거림을 당하면서 여기저기 떠도는 3류배우가 된 것은
너무 잔인한 몰락이 아닌가 생각했다.
어린 시절 꾼 꿈에 비해, 부모님들의 기대에 비해
한참 못미치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는 우리들의 모습.
실제로는 고만고만한 대학도 가기 힘들고
특출난 매력도 없고 실력도 없고 특기도 없고
그냥 이모습 이대로.... 사실 뭐 대단한 것도 아닌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나를 내가 인정해가는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거라는 사실.
고만고만한 인생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게
현실인식이고
어른이 되는거고
성장하는 거라면
그건
너무 잔인한 현실인식이 아닌가 생각했다.
<바냐아저씨>의 바냐는 4막에서 계산만 한다.
옆에서 아직도 공허한 이상적인 외침을 늘어놓는 소냐 옆에서
바냐는
콩나물 몇 단에 천이백삼십원...석탄은 얼마, 세금은 얼마, 쓰레기봉투는 얼마, 급여는 얼마...
주판을 튕기며 계산을 한다.
그러고 막이 내린다.
이것도 너무 잔인한 현실인식이다.
한때는 가수를, 한때는 대통령을, 한때는 무언가를 꿈꿨던 우리의 엄마와 아빠들도
현재는 그러하지 않나?
그냥 월세걱정하고, 그냥 오늘 장보는 물가걱정하고...
나는 바냐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울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귀결되는 모습이며
나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체홉은 왜 작품들 속에서
좌절한 이상주의와
잔인한 현실인식을
항상 병치시켜 왔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상승욕구 그 자체의 고결성
이것은 검증된 작품해석이 아니다.
그냥 나의 상상일뿐이다.
나는 체홉이
좌절한 이상주의와 잔인한 현실인식을 병치시키는 것을
인간성의 본질로 본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저 인생이 그저 그렇고
살아보면 그게 그거고
결국.... 그렇고 그렇게 살고 마는게 인생이지...
라는 채념적인 사고와는 다른
무언가 더 깊은 지점이 있다고 본다.
그 깊은 지점은
숭고함의 지점이다.
우리는 왜 체홉작품을 접하면
고결해지는 걸 느낄까?
친구야. 체홉작품을 읽고나서
무언가 먹먹해지고
무언가 숭고해지고
무언가 고결해지는 정서를 느낀적이 없나?
나는 그렇더라.
나는 체홉작품을 읽고나면
고결해지더라.
이름없는 들꽃 하나를 보면서 생각한 적이 있다.
이 들꽃의 존재목적은 무엇일까?
어떤 목적과
어떤 기능을
세상에 더해줄까?
이 이름없고 별볼일없는 들꽃 하나쯤이야
있어도그만, 없어도그만
아닐까?
그 조그만 들꽃이
보잘것없지만 색깔을 내고, 모양을 갖추고 나름의 미세한 향기를 가지고
그 자리에 피어있는 걸 보면서
체홉을 읽고난 다음 나는
처음으로 그 들꽃이
고결하게 느껴진 경험을 했다.
그냥 거기 있는 그 들꽃이
그 보잘것없는 모양새로
별목적도 별의미도 없이
거기 그 자리에서
살겠다고 나름 발버둥치는 모습이
나는
고결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둑고양이들의 울음소리가 예전처럼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라
깊은 밤의 춥고 외로운 텅빈 공간속에서
가늘고 날카롭게 이어지는
生의 욕구로
느껴졌다.
숭고했다.
너는 보잘것 없을지도 모른다.
너는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너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때 타고난게 특출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결국 너의 원대한 꿈은 신기루에 그칠지도 모른다.
결국 너는 평범하게 살다 죽을 것이 틀림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나는 36세가 되어보니
뭐 별로 대단한 사람은 못된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나는 뭐 36세가 되어보니
뭐 나는 별로 특출난 사람이 못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결국 나는 이룬 것, 또 앞으로 이룰 것 보다
이루지 못한 것.
또
앞으로 이루지 못할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임을
36년을 살아보니
알게
되었다.
너도 마찬가지일거다.
그러나
너도
나도
고결하다.
그 작은 욕심들이 고결하다.
마음 속 상승욕구들이
꼼지락대며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너와 나의 모습들이
그 노력들이
새벽 5시가 되었는데도 뭔가 글 하나 써보겠다고 꼼지락대는 내 모습이
또 이따위 잡문을 읽으면서 무언가 예술이나 연극영화진학 같은 꿈이라도 꿔보는 네 모습이
나는
참 고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체홉의 작품이 고결한 이유이다.
이름없는 들꽃이 바람속에서도 힘줘서 뿌리내리고 살겠다고 굳세게 서있는 그 고결성과
추운겨울 한밤중에 골목을 지나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고양이가족의 고결성과
안톤 체홉 작품 속 인물들의 고결성과
지금 그 보잘것 없는 꿈이라도 꿔 보는 너와 나의 고결성은
모두
같다.
꿈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꿈꾸는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꿈꾸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꾼다 라고 한다.
꿈이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동사는
꾼다. 라는 동사이다.
꿈은
꾸는거다.
꿈의 가장 깊은 속성은
달성에 있지 않다.
그것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꿈꾸는 행위' 그 자체에 있는거다.
그게
아이스킬로스가 애도하는 엘렉트라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인간성이며
체홉이 등장인물들을 통해 달성한 고결성이며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묘사한 인간성이다.
꿈꾸는 행위 자체가
꿈의 본질이다.
꿈은
이루는게 아니라
꾸는 것이니까.
더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자 하는 욕구
더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
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고
더 이름을 알리고 싶고
더 아름다워지고 싶고
더 멋진 인생을 살고 싶은
모든 욕구
가져서는 안될 모든 것을 욕망하는 그 모든 욕구들.
갈망들.
꿈은 이루어져야 맛은 아니다.
이루어지는 꿈 때문에 삶이 고결해지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삶이 고결해지는건
꿈을 꾸는 행위 그 자체에 기인한다.
고결성의 회복
자 이제 개똥쓰레기철학의 결론으로 가보자.
친구야. 눈을 감고 한번 생각해보자.
너한테 부탁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좋다.
니가 다 때려치우고 공무원시험 준비해도 나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니가 재능도 없으면서 연기한다고 몇년을 도전해도 그것도 멋지다고 생각하고,
네가 권태에 찌들어서 집안에서 매일 밥만 축내는 백수나으리가 되어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백수도 나름 멋있는거거든. 편의점에서 맛있고 저렴한 음식 사다가 인터넷하고, 게임하면서 따신 방구석에서 사는게 사실 행복한거 아니냐. 행복을 선택하겠다는데 그 누가 비난한까?)
그 어떤 선택을 해도
그건 본질적인 건 아니다.
그건 상황적인 거고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선택 자체로 크게 고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탁하고 싶다.
고결성을 회복해야 한다.
너는 모든 걸 다 잃어도
고결하다는 믿음.
그 하나는
붙들어야 한다.
이름없는 들꽃이 왜 아름답지 않을까?
거대하고 화려하고 희귀한 꽃만이 가치있을까?
그건 아니지 않나?
못생기고 쓸모없는 곤충도
숭고하다.
삶은 그러한 것이다.
삶 자체로 숭고한 것.
그러니
너는 반드시
고결함을 회복해야 한다.
숭고함을 회복해야 한다.
너는 존재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다는 믿음.
아무리 터무니없어도
네가 꿈꾸고 있는 그 모든 꿈들은
꾸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고결하다는 믿음.
너의 모든 욕망과
너의 모든 생각과
너의 모든 가져서는 안될 것들을 가지고자하는 갈망들을
나는
지지한다.
그게 인간이다.
고결성을 회복한다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미래가 펼쳐진다.
이것은 정신승리라고 하는 냉소적 표현과는 다르다.
정신적 자위행위가 아니다.
엄청난 삶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가치의 회복이고,
위대한 예술의 천재들이 모두 귀결되는 대주제이다.
그렇지않은가?
위대한 영화들을 보라. 그 영화의 결국은 어디로 귀결되는지를 살펴보라.
이루지 못한 꿈들도 충분히 가치있고 고결하다는 믿음이 있을때
좌절한 이상주의가 남긴 깊은 상흔을
극복할 가능성이라도 열리지 않을까?
못난 모습이 있는 너 자신을 고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때
네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의 못남 역시 고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못난 이들은 만나기만해도 반갑다. 라는 시구절이 생각난다.
못나면 어떠냐! 그저 만나면 반가운게 우리인데 !
고결함은
무너지지 않는 가치 이다.
대체할 수도 없고
없앨수도 없고
빼앗기지도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을
가장 위대하고 본질적이고 숭고한 가치 !!!
이 글을 쓰는 새벽. 몇시간전에 극장에서 위플레쉬를 봤다.
역시 같은 이야기다.
드럼연주자로서의 성공은
목적이 아니다.
넘을 수 없는 그 지점을 넘어서기위해
영혼을 불태우는 것.
그 행위 자체의 숭고함이다.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 행동 속에, 욕구속에, 과정속에
숭고함이 깃들때
우리는 거기서
예술의 극치를
목도하지 않았던가 !
체홉의 모든 작품이 도달한 지점은 고결성의 지점이다.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역설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고
이창동의 오아시스, 밀양, 시가 도달한 지점도 여기.
김기덕의 피에타에서 강도가 도달한 지점도 바로 여기다.
삶의 고결함.
바로 그것이다.
2015. 3.29 intheatre 고결함이 또 하나의 고결함에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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