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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돋움 (1)- 열등감에서 내적동기로연극영화과에 대해 말하다 2014. 2. 19. 06:14
내가 좋아하는 카톨릭 수사이자 세계적인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의 대표작은 <상처입은 치유자>이다. 수십권에 이르는 그의 책은 거의 다 읽어보았는데, 특히 인상깊었던 책 중에 <아담>,<춤추시는 하나님>,<영적 발돋움> 등을 손꼽는다. 그 중 <영적발돋움>이란 책에서 오늘 포스팅의 사유를 끌어와 '발돋음' 시리즈를 연재하려 한다.
인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분법적이란 거다.
인생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분법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사실과, 그 사실 속의 이면을 함께 고려한다.
text와 sub-text를 동시에 보며
피터 드러커의 말처럼
10분 후와 10년 후를 동시에 바라보며
얻는게 있으면, 잃는게 있고
잃는게 있으면, 얻는게 있고
선 뒤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있음을
위험속에 또한 결정적인 기회가 있음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한다.
지혜롭다는 말은
지식이 많다는 말과 다르다.
지혜로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통찰이다.
이 통찰은
드러나지 않음을 볼 수 있는 눈에서 나온다.
어떤 표현이든 결국 하나로 통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란 사실이다.
열등감을 안아주다
발돋움 첫번째 순서로 '열등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열등감이란 단어는 매우 중요하다.
안톤 체홉의 위대한 장막극 <갈매기>를 보면
뜨레쁠레프와 니나 모두
결국엔 열등감 속에 사로잡혀 있고
그 열등감이 그들의 인생을 사로잡는다.
언뜻보기에 <갈매기>는 사랑에 대한 작품이지만
조금 더 깊이있게 살펴보면, <갈매기>는 또한 '열등감'에 대한 작품이기도 하다.
뜨레쁠레프는 작가로서의 명성에 대해
뜨리고린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또한
니나는 유명인이라는 면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아르까지나는 젊지 않다는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으며
뜨리고린은 인생의 허무함이라는 실존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가 아무리 당대에 유명한 작가라 하더라도 그의 묘비명에는 '꽤 재능은 있었지만 톨스토이에 비하면 하찮다'라고 쓰여질거라는 희곡 속 뜨리고린의 대사가 기억난다)
마샤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상처를, 또한 안고 있다.
로버트 맥키 스토리 이론에 따르면
결국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은
균형감각을 회복하고자하는 목숨을 건 도박에서 나오는 건데
이때
사건 속 주인공의 선택에는
결핍이 내재되어 있으면 좋다.
그의 결핍이
어떤 상황에서의 특정한 선택을 이끌고
그 선택때문에 주인공은
어떠한 결말을 맞게되는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스토리의 골격이다.
이때의 결핍의 다른 말이
바로 열등감이다.
즉. 안톤 체홉의 사유를 따라가보나,
로버트 맥키의 사유를 따라가나
열등감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의 문제이며
매우 중요한 감각이다.
여기서부터 어떤 인식적 전환이 시작된다.
열등감에 대한
보다 근원적 인식변화가
필요하다는 거다.
열등감에 대한 인식변화가
열등감으로부터 발생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첫걸음이 된다.
열등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열등감에서 '벗어'난다.
라고 표현한다.
열등감을 인생의 적이자, 피해야 할 대상, 매우 부정적인
한마디로 인생을 좀먹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표현이다.
이게 문제다.
열등감이 인생을 좀먹는 개념으로 파악하기에
열등감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없다.
열등감 = 부정적
이라는 이분법에 빠짐으로서
열등감이 주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혈맥을 차단해버린다.
그러나 앞에서 예로 든 사례를 봐도
헨리 나우웬, 안톤 체홉, 로버트 맥키
모두
열등감과 결핍을
부정적 개념으로만 '단정'짓지 않고
열등감 자체를 자꾸 뭔가로 대체하려 하지않고
열등감 자체에
머무른다는게 보인다.
요컨데
머무를 줄 아는게 중요하다.
인생에선
가는 것보다, 선택하고 행동하는 것보다
머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지만
우리 인생의 대부분은
머물러 있다.
특별한 사랑의 추억은 극소수이며
대부분은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고
특별한 일탈의 기억 역시 매우 이례적이고
대부분은 지루한 삶의 연속이다.
특별함보다
지루함이
더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미적인 것보다 추한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른바 추의 미학 '카를 로젠크란츠' 의 탄생이다)
꿈보다 더 중요한게
오늘의 일상을 충만하게 사는 거다.
그런면에서
달리는 것보다
정지하는게
더 중요하다.
열등감은
열등감 자체에
오래도록 머물러 보는게 중요하다.
도망가려하지말고
그 감각을
그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머무르는 것이 중요하다.
열등감에 일단 머물러라.
열등감을 피하지 말고
열등감을 붙잡아라 !
심지어
열등감을 안아라 !
열등감의 내재적 요소
그렇다면 - 열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열등감은
이루어지지 않은 꿈에서 온다.
원하는 것이
열등감의 전제조건이 된다.
need, 혹은 desire (그래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의 제목이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이다)
가
열등감의 전제조건이다.
need, 혹은 desire가 없으면
열등감도 없다.
예를들어
이 글을 쓰는 나는
수지에 대해 아무런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수지는 내가 meet하고 싶은 사람이지
열등감을 불러오는 존재는 아닌 거다. (필자는 남자임)
마찬가지로 나는 반기문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지 않다.
필자보다 반기문이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반기문에 대해 어떠한 열등감도 갖고 있지 않다.
그건
내가 반기문의 삶에 대한 need나 desire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꽤 잘나가는 강신주와 같은 대중적 저자이자 강연자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내게는 그런 삶에 대한 need, 혹은 desire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터놓고 연극영화나 쓰고 있지만
내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천명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오늘 쓰고 있는 사유들을
폭팔적으로 쏟아부을 가능성을
내 스스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씨발. 진짜 나도 책내고 강의하면 진짜 꽤 괜찮은 강연자, 저자 될 가능성 있다고 보는데 도대체 어떻게해야 그렇게 무대위에 설 수 있는거냐? 누구를 찾아가야하는거지? 블로그 수준 밖에 안되는건가? 혹시나 이 글을 보는 사람중에 그런 기회 아는 사람있으면 연락달라 날 좀 키워달라 등등)
알겠지?
열등감 속에는 need와 desire의 문제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또한
열등감 속에는
근접성이 전제되어 있다.
네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 속에는
상당한 근접성이 내제되어 있다.
반에서 2등하는 애가
1등하는 애한테 열등감을 느끼지
반에서 50등하는 애가
1등하는 애한테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한번 해볼만 한게 아니면
인간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 격차가 현저하면
오히려 인간은
편안함을 느낀다. (난 이건희를 생각하면 편안해진다)
놀랍지 않은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말 속에는
상당히 근접해 있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이 !
여기서 엄청난 사유가 하나 보물처럼 건져진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열등감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등감을 붙잡는 사람이며
그 열등감 속에서
반드시 열등감을 뛰어넘을 기회를 잡는 사람.
말하자면
'근접전'의 대가 인 것이다.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고지가 머지 않았다는 말이다.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이루어질만한 요소를 내가 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00%를 기준으로
90%이상 근접한 사람들이
100%에 대한 열등감을 느낀다.
나는 이건희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수 500이상의 학원에는
열등감을 느낀다. (바꿔 말하면, 500명 학원이 가시권에 있다는 말. 내가 이건희가 될수는 없지만, 500명학원의 원장은 될 가능성이 반드시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술은 작은 것이고,
인생의 성공비결도 작은 것이라 믿는다.
열등감은
일종의 타이밍이다.
근접해있는 것이다.
내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게 need와 desire가 생겼다는 말이고
목표가 생겼다는 말이고
영점사격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위대한 사람은
인생에서 부딪히는 열등감 속에서
그 작은 격차들을
좁혀가며
열등감을
도약의 기회로
삼아온 사람들이다.
개 중에
투견 전문 종자로
핏불테리어가 있다.
이 놈들의 특징은 무엇이냐?
물면 놓지 않는다는 거다.
다른 대형 품종들에 비해
핏불 테리어는
사이즈 자체는 그다지 크지않은 편이다.
그러나 핏불테리어가 투견의 제왕으로 불릴 수 있는데는
물면 놓치 않는 특유의 근성이 있다.
동영상을 봤는데
진짜 척추가 부러지면서도
문 목덜미를 놓지 않더라.
결국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고서야
무는 행위가
끝이 난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열등감이 발생되는
그 인생의 격차들을
반드시
극복하는데
성공하는 근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영점사격에 능한 사람들이다.
일단 범위에 들어오면
반드시 달성한다.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건
작은 목표가 쌓이면서 가능하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
결론을 내자.
난 오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해왔다.
열등감은
피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붙잡아야 할 개념이며
열등감의 전제조건으로 need와 desire가 있고
열등감 속에는 근접하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쉽지 않나?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열등감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를들어
돈을 극복하는 방법 따위를 우리는 연구하지 않는다.
돈은
극복하는게 아니라
지갑속에 넣는거다. 잽싸게. 아니면 계좌로 입금하든지.
sex를 극복하는 방법을 연구하지 않듯이 (sex역시 불안정하고, 무언가 욕구불만을 해결하려는 갈망에서 시작된다는 면에서 비슷하다)
열등감 또한
부정적 단어가 아니므로
극복한다는 말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것이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국
열등감을 붙잡는 방법 뿐이다.
네가 열등감을 느낀다는 건
네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네가 현재 영점조준이 시작되었단 말이며
네게 근접전이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need와 desire가 없다면
열등감 또한 없다. (그러니 네가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면, 넌 살아있다는 말이다. 축하한다)
열등감이야 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감각인 것이다.
진짜 주저앉은 존재는
열등감이 죽어있다.
그 어떤 need와 desire도 없이
주저앉은 상태가
가장 불쌍한 것이다.
현실만족이
가장 무섭다.
불안정은 성장의 동력이 된다.
나를 멍청하고
그저 그렇고
병신같은 인생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를 자극시키는
고마운
나 자신이 내게 선물해주는
강력한
에너지
인 것이다.
로케트가 연료를 태우며 우주로 날아가듯,
인간은
열등감을 연료삼아 목표를 향해 날아간다.
그 소중한 자원이
열등감이다.
열등감은 성취로 채워진다
섹스는 사랑의 행위다.
사랑에 대한 갈망을 채워주는 결과론적 행위가 섹스다.
마찬가지로
열등감이란 갈망을 채워주는 결과론적 행위는
성공이다.
그래서 작은 성취가 중요하다.
작은거라도
욕망 - 성취의 패턴을
반복해서 습관화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작은 목표를 세우더라도
반드시 노트에 적고
반드시 체크하고
반드시 달성한다.
내 좌우명은 너무 간단하다.
어제보다 오늘. 눈꼽만큼이라도 나은 사람, 나은 사업, 나은 삶이 되자
이다.
조금씩 달성하는게
진짜 큰 달성을 불러온다.
피터 드러커의 말이 딱 맞다.
10분후와 10년후를 동시에 보면서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예로 들어보자.
학력에 대해 열등감을 느낀다는건
내가 가진 가능성이
현재의 조건보다 다소 앞서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반기문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내가 UN사무총장자리에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것은
UN사무총장은 나의 현재적 조건이나 능력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포텐셜이 있다.
그게 사람마다 똑같지가 않다.
누구는 4년제에 만족하고
누군가는 도쿄대에도 불만족할 것이다.
네가 지금 학력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건
현재 너의 수준이나 가능성이
현재의 대학이나
현재의 상황보다
더 나아져야 할
가능성이
네게
잔존해 있다는 증거이다.
나의 예를들자면
내가 한예종 진학하기 전엔
나도 학력에 대한 다소간의 열등감이 있었다.
주변에 한예종 간 애들 보니까
다들 병신도 가던데
내가 글을써도 저 새끼보다 잘쓰고, 말을 해도 저 놈보단 잘하는데
왜 저 놈은 한예종엘 가고 난 못갈까?
나는 왜 한예종에 못갈까?
어떻게 해야 가는거지?
도대체 뭐가 문제야?
등등의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한예종엘 가고나니
내 수준이 고만고만해서
한예종엘 다니는게 벅찬 지경이 되어서야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그치더라.
내 수준보다
좀 더 나은 학력들을 얻고나니
멈추더라.
다니는 것만해도 고맙지. 뭐. 주변을 보니...다들 나보다 똑똑하더라고.
합격했기에 열등감이 사라지는게 아니라
내 수준보다 초과달성했기에
이제 만족하고 정착할만해진 거다.
초과달성할 때
머무르게 된다.
이때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게는 한예종이 딱 적당한 기준이었다.
누군가는 한예종 따위가 아니라
훨씬 더 가치있는 목표에 갈증을 느끼고
누군가는
UN사무총장이 그 기준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너의 포탠셜을
채웠을 때에야
너의 열등감은
치유될 수 있다.
그것은
거룩한 갈망이다.
인간을
보다 진보적으로, 가치있게 만드는
숭고한 갈망 아닌가? 열등감이란?
성욕이 없이면
인간이란 종족의 번식이 불가능하듯
열등감이 없으면
너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열등감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인류의 진보는 없었을 것이다.
이런면에서 열등감과 성욕은 동일하다.
존재를 끝없이 갈망하게 하고
끝없이 불안하게 하고
끝없이 목적하게 한다는 면에서.
열등감이 인생을 망치는게 아니라
그저그런 인생으로 머물러있는 인생이 진짜 불행인 것이다.
학력에 대해 열등감이 있다면
그 열등감을 근원삼아
최대한 전진하라.
그게 젊음의 특권이다.
더 좋은 학교로 잽싸게 옮길 수많은 기회를 엿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성취하라.
그건 숭고하고
거룩한 욕구이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은 더 나은 학력으로 손쉽게 성취되지만
그 정도 수준에 머물러봐야 별거 없음을 곧 느낄거다.
학력은 진짜 낮은 수준의 욕구다.
당장 결혼정보업체만 봐도 학력좋은사람은 널려있다. 그 비싼 등록금내고 다니겠다는데 왠만하면 다 뽑아준다. 좀만 노력해라. 잘안되면 두배 노력해라. 무책임하게 들리겠지만, 대학진학은 인생의 수많은 도전들에 비하자면, 상당히 초급수준의 도전임을 기억하라. 기회는 온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오히려 내가 네게 권면해준다면,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데
네가 원래 지능이 좀 낮아서 (내가 지능이 낮거든 아이큐가 90이더라. 씨발 돌고래보다 10이 높다는게 말이되냐? 그래도 인간인데)
성적이 좀 안나온다면
그럼 뭐 별수없잖아?
근데 안되는 학력 자꾸 붙잡지 말고
예술분야를 예로 들자면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원동력 삼아
창작 및 작품의 성공으로
성취하면 된다.
학력이 학력으로만 대체되는건 아니다.
열등감은 그 어떤 종류의 성공으로도 전부 다 대체가능하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을
작품의 성공으로
충분히 만회할 수 있다.
똥파리 양익준이 대표적이다.
세상의 주류에 대한, 또 학력에 대한 여러가지 컴플렉스들을
창작을 통해 오히려 더 훌륭한 가치로 승화시킨
적절한 사례이다.
네가 연기자를 꿈꾸는데
좋은 학교를 원했지만 잘 안풀린다.
그러면 다음 단계에서 성취하면
전 단계의 컴플렉스도 같이 풀리는걸 경험할거다.
송강호, 김윤석이 되어서 학력 컴플렉스를 가지지는 않을테니까.
학력 운운 하는 연기지망생들이 얼마나 귀여워보이겠냐?
그러니
A에 대한 열등감을 A로 극복하는게 일단 좋지만
잘 안되면
A에 대한 열등감을 B의 성취로 극복하면
A와 B 모두 정리가능하다는 말이다.
한국말이 참 어렵고
영어는 정말 심플한데
열등감의 영어단어는
complex이다.
심플하지?
컴플렉스는
그 자체로
부정적인 단어가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성취의 근본동력이 된다.
나폴레옹이 체격이 크지않은 (물론 그 시대 평균키에 비해 키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은 섬인 코루시카 섬 출신이라는 컴플렉스가 더 컷을 것이다)
컴플렉스를 원동력 삼아 전 유럽을 정복했고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라는 열등감을 보상하기 위해 오히려 강력한 대중연설, 그리고 상반신만 찍어서 노출하는 사진이미지등을 발전시켰고, 이로인해 강인한 대통령의 이미지로 역사에 남았다.
몽골은 변방의 제국이라는 열등감을 원동력삼아 제국을 건설했고
모택동은 강대국에 대한 열등감을 인민혁명의 불씨로 동력삼았다.
이런 거창한 사례가 아니더라도
예술가의 경우만 봐도
열등감이란
정말로
가치있고
고귀한
창작의 재료가 된다.
그게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불만족하고
추구하고
갈망하는
인간의
실존.
열등감을 피하지 말라.
열등감을 붙잡아라.
그리고
발돋움 하라.
열등감에서 내적동기로.
예언하나만 하자면,
넌 죽어도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열등감은 인간 존재 자체의 실존에 이미 내재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그래서 무조건 현재진행형이다.
절대로 과거형이 될 수 없다. (극복했다라는 과거형)
인간은
존재근원의 실존 자체가
열등적이다.
어디로와서
어디로가는지 모르는
채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
그 자체가
complex인 것이다.
열등감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열등감은
사랑하고
붙잡고
동기삼아
끊임없이 전진할 수 있는
숭고한 에너지이다.
마치 성욕이 인간의 번식을 이루듯
complex는 인간의 진보를 이루는
원료이며
깊은 갈망이며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영원한 고갈이다.
그래서
열등감을 느끼는 네가
난 참 대견하다고 느낀다.
짜식.
곧
성장하겠구나.
그러니 열등감
더 많이 느껴라.
두번 느껴라.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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