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행복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너무나 부족한 책이지만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고보니, 글을 쓰는 일이 너무 재미있고 내가 세상에 살아가는 의미를 찾게 해준다.


학생들 상담이 끝나고 원장실에서 그동안 묵혀놨던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를 읽으면서

또 블로그에 쓸 좋은 글 소재를 수없이 찾아내서

그 순간 가슴에 꽉 찬 행복감이 있더라.

쾌락적인 기쁨과는 전혀 다른, 존재적으로 충만한 즐거움이라고 할까?

그런 행복감에 수많은 문장들에 줄을 긋고, 영감을 받아 이렇게 포스팅까지 쓰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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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재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며 제3의 옵션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고 확신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너무 쉽게 도달한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의하면, 실재에는 '제3의 층위'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를 말하는데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바로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으로 만들어지는 실재이다.  (객관도 주관도 아닌 제3의 층위)

우리는 만원짜리 지폐 그 자체론 먹을수도 마실수도 아무것도 할수가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만원짜리의 가치를 믿는 한 당신은 그 만원짜리로 빵을 사먹거나, 짜장면을 사먹을 수 있다.

이때 이러한 의사소통으로 만들어지는 실재를 유발 하라리는 '상호주관적실재'라고 부른다.


이때 '의미의 그물망'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는데, 예를들어 라마단에 금식하고, 교회에서 결혼하고, 선거일에는 투표를 하는 등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면서 영속적인 고리를 만들어나가며 만들어지는 의미를 말한다.


그런데 이 의미의 그물망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들이 후세 사람들에겐 전혀 의미없는 가치가 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십자군원정을 자원한 어린 십자군병사의 예를 들어보자면, 그는 그러한 이교도와의 전쟁이 그에게 영생과 저 천국에서의 거대한 보상을 줄것이란 의미의 그물망 속에 갖혀있었기에 그러한 행동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신념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고 십자군전쟁에 자원한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고, 이용당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한다. '의미의 그물망'이 변화한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한 개념이냐면,

이 시대는 끊임없이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새로운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그것은 제3의 층위에 존재하는 막강한 실체로 우리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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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승리와 연관된 클럽 버닝썬의 사태가 매우 좋지못한 사례이며,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기존 클럽.에서 벌어져온 일들, 특히 마약이나 성적인 착취와같은 일들이 물론 요즘에만 있어온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일은 기존의 의미작용에선, 좀 심하게 노는 언니, 형님들? 그런 사람들만의 어떤 고립된 세계의 일로 대중들에겐 인식되어져 있어왔다. 사회가 자연스럽게 형성한 어떤 거리감이 있고, 그 거리감이 많은 순진한 청소년들과 자연스러운 거리를 형성하게 해주었다. 

승리의 사건이 역겨운 것은, 청소년들의 우상. 즉 요즘 청소년들에게 막강한 의미작용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아이돌, 스타, 팬덤과 같은 문화들이

고의적이든, 우연이든,  위 범죄적 행위. 예를들어 연예인을 원하는 지망생들을 클럽에서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마약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하는 새로운 '의미의 그물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아이돌을 좋아하고, K팝을 좋아하는 청소년들의 행동에

교묘하게 변태적이고, 착취적인 문화적 의미를 혼합시켜 그렇게 노는게 핫한 것이고, 그렇게 노는게 잘나가는 거고, 그렇게해야 트렌드에 맞는거란 생각을 하게 교묘하게 작용해온 것이다. 

빅뱅이라는 대단한 인기를 가진 팀에 소속된 연예인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이번 클럽에서 벌어진 일들은 확장성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며, 예전부터 존재해왔던 좀 심하게 노는 형, 누나들의 그들만의 문화로 큰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다.

즉 승리라는 한 연예인이 이번 사건에서 가장 잘못한 것은, 본인이 가진 영향력과 의미 (대부분 청소년들인 대중이 만들어준 고마운 힘, 결국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들어준 힘) 를 범죄적인 영업행위에 사용함으로 의미를 더렵히고, 심각한 범죄행위에 연결고리를 만드는데 고의, 또는 부지중에 기여했다는데 그 심각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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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스토리. 그리고 그것들의 연결이 거대한 힘을 가진다는 것. 종교나 철학등을 생각해보면 쉽다.

스토리를 쓰려하는, 또는 문화산업에 종사하려하는 우리들은 반드시 유념해봐야 될 생각이다.

스토리는 일종의 메타포가 되어야 되는데, 현실을 담되, 있는 그대로 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보이지않는 것들을 보는게 예술가의 진정한 역할이기 때문이다. 즉. 스토리가 묘사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들에 대한 재현이 아니라, 보여지는 세계들 속에 숨어있는 진짜 의미와 그 의미의 영향력에 대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진짜 의미가 고결한 의미이든, 인간의 추악한 욕망이든, 예술가는 그 은폐된 진짜 현실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


의미의 그물망이 현실에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는 것을 유발 하라리는 몇가지 예를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한 유대교 소년이 왜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되는지 아버지에게 물어볼때

유대교 아버지는

'얀켈레야,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란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신이 우리를 벌하고, 우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단다. 이건 랍비가 만든게 아니야. 신이 만든거지. 이유는 모르지만 신은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우리는 먹으면 안 된단다. 알겠니?'


이런 논리는 이렇게 확장될 수 있다.


1943년에 한 독일인 소년이 나치 친위대 장교인 아버지에게 '왜 유대인을 죽여야 되는지를' 묻는다. 나치 장교인 아버지는 번쩍이는 군화를 신으며 이렇게 말한다. 


'프리츠, 그게 세상의 작동원리란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유대인을 살려두면 그들이 인류를 타락시켜 멸종하게 할거야. 이건 내 생각도 아니고 총통의 생각도 아니다. 총통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유대인과 아리아인이 조화롭게 잘 살수있는 세상을 창조했을꺼야. 하지만 세상은 히틀러가 창조한게 아니지않니? 그는 단지 자연법을 해독했고, 그 법칙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시했을 뿐이야. 우리가 이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쁜 운명을 맞게 될꺼야. 알겠니?'



예술가가 인간 네트워크의 역사, 혹은 현실의 삶을 바라볼때는, 이따금 멈춰서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게 좋다.

전쟁의 원인은 허구이지만, 전쟁의 고통은 실제한다. 

우리가 허구와 실제를 구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수가 없다.

그러나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밎을 때 우리는 실재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어떤 고통스런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고통은 실제하는 것이다. 


좋은 예술작품은 거대한 허구속에 짓눌려진 작은 계층의 실제를 드러낸다.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는 중국의 수몰된 지역을 무대로 그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드러내는데,


예를들어 양쯔강에 산샤댐을 건설하는 문제를 생각해볼때, 1992년 중국정부가 이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을때. 수학,과학적으로 그 댐이 전기를 얼마나 생산해내고,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을지 예측했다.

그러나 많은 마을과 도시, 수천 곳의 고고학유적지, 독특한 지형과 생태를 보유하고 있던 60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이 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100만명 이상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수 백종의 생물들이 멸종위기에 처했다. 

지아장커의 작품은 이런 면에서 예술이 가야할 지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 (칸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천주정을 보면

중국 사회의 자본주의 끝을 보여주는 여러 극단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돈아래 사람의 가치가 몇 푼 돈보다 아래로 전락해져 나타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들.

감독은 마지막 대사에서

경극 배우의 입을 빌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일갈한다.


예술가가 언론과 다른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게 아니라 하나의 상징(메타포)적 이야기를 통해 드러냄으로서

보이지않는 의미들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점.

그리고 메이저언론이 중요한 사건들을 다루느라 놓칠수밖에 없는,

깃털처럼 나약한 존재들, 별로 다룸직하지 않은 개인들을 통해 

매우 거대하고 막강한 어떤 숨겨진 힘을 바라보고, 직시하고,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장률감독의 만종을 통해서 경계선 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볼 수 있고

지아장커의 영화를 통해 현대 중국 을 밖이 아닌 속에서 속을, 속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얼마나 거대한 말그대로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중국사회의 곪은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종교와 영성의 차이를 말하면서, 영적여행에 대해 말한다. 그는 영성이 종교의 가장 큰 적이라는 파격적 주장과 함께, 종교와 영성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 이 종교와 영성의 차이에 대한 개념이 예술을 하기로 한 우리가 사회를 생각하며 생각해볼 개념이다. 


영적 여행은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이 여행은 사람들을 미지의 목적지로 향하는 신비의 길로 데려간다. 이런 탐색은 대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무엇이 선인가?' 같은 커다란 질문에서 시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위자들이 제시하는 준비된 대답을 그냥 받아들이는 반면, 영성을 찾는 구도자들은 그리 쉽게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잘 알거나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그 커다란 질문이 이끄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갈 각오가 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학교 공부가 영적 여행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계약인 이유는 이렇다. 그 공부가 어른들, 정부, 은행이 인정하는 예정된 목표로 학생들을 데려가기 때문이다. 

'나는 3년간 공부하고 시험을 치러 석사학위를 따고, 연봉이 높은 안정된 직업을 가질 거야'


기존 종교의 믿음과 관습에 도전하는 것은 많은 경우 영성을 좇는 구도자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중 하나이다. 선불교에서는 '가는 길에 부처를 만나면 그를 죽이라'라고 말한다. 영적 길을 걷는 동안 제도화된 불교의 경직된 사상과 고정된 법을 만난다면, 거기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영성은 종교에게 위협이다. 종교는 대개 신자들의 영적 추구를 견제하며, 영적 구도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카톨릭 교회이 권위에 대한 저항에 불을 붙인 사람은 쾌락주의적 무신론자들이 아니라 독실하고 금욕적인 수도사 마르틴 루터였다. 루터는 인생의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고, 그래서 카톨릭교회가 제시하는 전례, 의식, 거래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종교와 영성에 대한 관계를 살펴보면,

사회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해볼 수 있게 된다.


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예술가는

안주하지않는 구도자들, 예술적 구도자들이 아닌가.


끊임없이 질문하기를 쉬지않으며, 사회의 상호주관적 실재가 만들어낸 의미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비딱하게 세상을 바라볼 줄 알며, 

사회가 만들어놓은 고정된 법에서 자유로워질 줄 아는 사람들.

어찌보면 예술가의 모습은 구도자의 모습과 비슷하다.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바꾸는 거대한 도전은 바로 이런 진지한 구도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사회와 예술의 관계는 어떤가? 이 사회속에서 예술이 존재할때 예술은 어떤 도전을 줄 수 있고, 어떤 충격을 줄 수 있는가?


유발 하라리는, 역사적 관점에서보면 영적 여행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난다고 한다. 영적 여행은 사회 전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적합한 외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협력을 도모하려면 질문만이 아니라 확실한 대답이 필요하고, 자가당착에 빠진 종교구조를 성토하던 사람들은 결국 그 자리에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부처를 만나면 그를 죽이라' 


예술을 하는데 하나의 규칙은 없다. 규칙을 없애기 위한 규칙또한 새로운 규칙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에겐 개성이 요구된다.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때 

자신의 삶과 경험, 그리고 생각들을 예술작품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때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속에서 어떤 의미를 생산해내고

그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는 

기존 질서속에서 교묘히 감춰져있던

많은 진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된다.


가장 개인적인 삶을 통해 가장 거대하고 은폐된 현실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현실의 메타포로 꾸며진 이야기를 쓰려하는 작가들, 감독들, 그리고 배우들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가치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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