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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니까 청춘아니다연극영화과에 대해 말하다 2013. 10. 7. 14:10
아프니까 청춘
아니다.
속지 마라.
내가 34면 살면서 들은
최악의 슬로건이
바로 저 슬로건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
세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한국에서만 들을 수 있는
아주 병신같은 슬로건이다.
저 말을 한 베스트셀러 작가 교수는
흔히 말하는 S대 법대를 나왔으며 386세대 출신이다.
친구야.
386세대가
저 시대에 S 법대를 나와서 안전하게 본교 교수하고 있는게
진취적 사람임을 입증할 근거가 되는가?
물론 S대의 교수직은 정말로 훌륭한 일이다.
위의 교수도 물론 각고의 노력 끝에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진취적이고 도전적이고
많은 모험을 감행한 삶을 살았다고 볼 근거는
그의 책
그의 삶
어디에서도 적어도 나 개인적으로는 찾을수가 없었다.
멘토란 말은 희랍문학 오디세이아에서 나온 말이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 나간 10년의 세월동안
그의 친구 멘토가, 오디세우스의 아이를 정신적으로 깊이 공감하며 훌륭한 스승으로 이끌어 주었다는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청년들의 멘토로 지칭하기에
그는
과연 오디세우스의 친구 멘토처럼
청년들의 삶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동감하려 했을까?
너무 유리한 길을 걸어온 건 아닐까?
아픔에 대해서 말하기엔,
사회로부터 받은 혜택이 너무나 많은 사람 아닐까?
386세대에서
한국의 고속경제성장의
모든 혜택은 다 누릴 수 있었던
베이비 붐 세대에 태어나
기득권의 핵심을 빨아먹을 수 있는
정점인
S대 법대를 나와서
흔히 이 사회의 노른자를 따 먹는건
너무 쉬운 일이다.
(저 교수 동기들의 목록을 보라. 장관, 차관, 시장.... 교수가 제일 못한 직업일 정도다)
말하자면, 사회의 다양성이 부족했던 시절이기에
오직 성공의 기준이
명문대 - 고시합격 등으로 축소되어 있었던 시절이기에
저 책을 쓴 저자의 경우라면
사회의 모든 긍정적인 기대와 자원과 기운이
그 저자의 인생을
도저히 실패할 수 없는 인생으로
탄탄대로로 이끌어줬음이 틀림없다.
물어보고 싶다.
교수는, 과연 아파봤는지?
절절히 아파봤는지?
아파봤다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모순된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
아니다.
아픈게 청춘 아니다.
청춘이 꼭 아파야 하는게 아니다.
청춘이 아픈 현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청춘이 아플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 지독한 현실이 중요한거다.
그걸 충분하게 성찰해주고 난 다음에
청춘들에게 말할 자격이 생기는 것 아닐까?
이 사회에서
청춘들이 고통받는 것은
경쟁의 무서움이 아니다.
공정한 경쟁에서
나의 노력이 부족하고
나의 재능이 부족해서
뒤쳐지는 것을
못 받아 들일 청춘 있는가?
없다.
어쩌면
오늘의 청춘들.
너무 일찍들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 버리지는 않는가?
너무 일찍 씁쓸함의 의미를
알아버리는 조숙한 청춘들이
함부로
경쟁에서의 정당한 승리와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짓지 마라.
청춘이 힘겨워 하는 것은
경쟁에서 낙오해서가 아니라
경쟁 자체가
공정하지 못해서 아닐까?
이미 어느샌가
이 사회가
공정하지 못하고
탄탄한 기득권이 만들어놓은
진입장벽.
사다리 치우기가
너무 심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 잘 만난 아이들은
이미 경쟁선 자체가 틀리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서울에 내가 잠잘 내 집 하나 마련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상처받고
아픈 것
아닌가 말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둘러대기엔
지금의 경쟁이
청춘들에게
너무
혹독하다.
약해빠져서 힘든게 아니라
공정하지 못해서
바리케이트가 너무 단단해서
엄두가 안나서
힘든것이다.
예술하는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최고의 학교 연기과를 나와도
한 기수에서 실제로
연기를 직업으로 가진 친구
30명 중 5명이 될까말까다.
혹독한 현실인거다.
그래서
아프니까 청춘을 넘어서는
좋은 사유를 하나 소개하려 한다.
바로 뮤지컬 빨래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뮤지컬 빨래를 다시보면서
절절한 감동을 받았다.
그 뮤지컬은
혹독한 청춘에 대해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정말 할 말 있다.
뮤지컬 빨래가 묘사하고 있는
그 석관동 옥탑방
월세 17만원 보증금 100만원짜리
바로 그 옥탑방 !
내가 3년 넘게 살았던
바로 그 곳이기 때문이다 !
거기서
500원밖에 없어서
너구리를 못 사먹고
안성탕면을 하나 겨우사서
버너에 끓여먹어봤기 때문에
진짜
그 뮤지컬에서 묘사하는
빨래가 너저분하게 널려있고
용달 열쇠 요런 스티커가 철제 샤시 문제 붙어 있고...
그런
옥탑방에서 살아봤기 때문에
너무 공감이 된 거다.
이렇게 공감은
디테일에서 온다.
예술작품에서 디테일이 중요한 이유는 -
그 디테일이
감상자의 삶의 경험과 일치할때
무한한 가치로 증폭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섬세한 삶의 조건에서 시작하는
뮤지컬 빨래가
다루고 있는
삶의 깊이와
넓이를 보라.
외국인 노동자들의 혹독한 현실에 대해 다루면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한국인을 다루면서도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가는 한국인들의 모습도
균형있게 다루는 것을 본다.
서점에서 일하다가 쫓겨난
변변치 못한 청년이
몽골출신 외국인 노동자와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거기엔
삶에 대한 직시가 있다.
그만두라면 그만둬야 하고, 방빼라면 빼야되는...
청춘들의 삶의 조건에 대해
정확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오로지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지도 않고
오로지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지도 않는다.
직장의 문제
학벌의 문제
사랑의 문제
가난의 문제
......
현실을 냉정하고
균형있게
다루고 난 뒤에야
작가는
비로소
말한다.
무대를 가득 채운
빨래세제의 향기와
향기로운 비누거품
(이 비누거품은, 빨래라고 하는 노동의 결과로 나온 정당한 향기이다.
인공적으로 향기를 내라고 만든 방향제가 아닐 것이다)
속에서
이제
비로소
주연배우의 등을 떠밀며
'자! 힘을 내!'
말하는 것이다.
힘을 내라는 말에 앞서야 할 것은.
고통에 대한 관조와
동감과
인식일
것이다.
섣부른 대안을 제시하려 하지 말라.
몰라서 못하고 있는거 아니니까 !
그저
청춘들은
현실에 대한 정확하고 예리한 인식을
예술과 문학과 글에서 얻기를 원한다.
그리고
처절하게 관조하고 나서
그다음에
힘을 내라고
말해야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도권이다.
뮤지컬 빨래에서처럼
주도권을
끝까지
청춘들에게서
빼앗으면 안된다.
자. 힘을 내.
라는 말 속에는
네가 스스로 헤쳐 나가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빨래가 그래서 멋진거다.
쭈그려 앉아서
노동해야
깨끗한 옷 한벌 입을 수 있는거니까.
함부로
청춘의
주체를
빼앗아선 안된다.
청춘에겐
청춘의
몫이 있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
아니다.
아픈 것과
청춘은
별개의 것이다.
그 아픈 삶을 이겨낼 몫 또한
주체 또한
청춘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저
힘을 내 !
한 마디면
족한
것이다.
우리에겐
가르침을 주는 사람들은 많지만
손
잡아주는 사람은
참으로 적다.
기성세대들은
손쉽게
청춘들의
나약함을 지적하지만,
나약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기성세대들
솔직하게 자신들의 기득권과
과오를
인정하는 기성세개들은
찾기가 힘들다.
섣부른 해결책이 필요한게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
아니다.
아픔과
청춘은 별개이다.
모든 청춘에게는
각자의
별이 있다.
아픔또한
그들
자신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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