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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어떤 막연한 꿈이나 목표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예를들어
'나는 레드카펫을 밟을꺼다'
이런 식의 목표를 정해놓고
그걸 생생하게? 이미지를 그리면 이루어진다는 식의 말은
그냥 말장난이라고 보면 된다.
실제로 그 일을 이루는 사람들은 그렇게 숫자적이거나 물질적인 목표를 한번에 설정하고 거기에 안달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다.
눈앞의 일을 차분하게 과정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는 스타일 (대부분의 고시합격자들처럼 현실적 노력파)이거나
큰 꿈을 갖고있지만 물질적이고 숫자적인 근시안적 목표가 아니라
보다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스타일 (일론 머스크)
두가지 타입밖에 없다.
자신이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어떤 구체적인 목표나, 물질적인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그걸 생생한 이미지로 그려가며? 노력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이 말은
자기인식에 대한 말이다.
자신이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자기가 스스로를 인식하는대로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나의 가치를 내가 정한다는 말과 같다.
나의 가치는 타인이 정하는 것 같지만
타인이 정한 가치를
내가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아무리 타인이 어떤 가치를 정해도
내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다.
이를 자존감이라고도 표현하는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함부로 받아들이지 마라.
나에 대한 평가나
나에 대한 낙인이나
나를 휘두르는 타인의 어떠한 형태의 편견에도
나를 내던지지 말라.
요즘 자살한 체육계의 자살사건이 대표적이다.
한대두대 때리면서 자존감을 높여주면서 때린다는 이야기 들어본적 있나?
폭력이전에
상대방의 가치를 낮추고 그 가치를 수용하게 만드는 지독한 가치폄하가 먼저다.
세뇌시키는 과정의 첫단계는
상대방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작업이다.
자세히 살펴봐라. 이런 형태의 부조리가 발생하는 사건의 상황, 인물들, 과정들을 면밀히 살펴봐면
내 말이 맞다는 걸 실감할꺼다.
상대방의 가치를 무너뜨리는 작업이 폭력이나 착취 이전에 먼저 일어난다.
사이비교주도 그렇고
데이트폭력도 그런 과정을 겪고
군기문화도 그런 과정을 겪는다.
스포츠 분야에 만연한 폭력과정도
대형병원에서 자행되는 소위말해 '태움'도
연극영화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위도
전부 동일한 과정으로 진행된다.
주변에 사람을 교묘하게 통제하고 조종하려드는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아나?
내가 중요한 특징을 이야기 해줄께.
상대방을 먼저 떠본다.
대상을 물색하는게 먼저다.
주변에 이런식의 세뇌를 잘하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대상을 잘 찾고
약하고 자신의 세뇌가 잘통할 것 같은 대상을 물색하는데 천재적 촉을 가지고 있다.
하이에나나 육식동물이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가장 약한 개채를 먼저 물색하고
그놈을 잡아 찢어 먹는 것과 같다.
당할만한 놈을 찾는게 첫 단계인 거다.
당할만한 놈을 찾았으면
그 다음과정은
'가치폄하'다.
그게 종교적방식이든
언어로 인한 방식이든
어떤 방식이든
너의 가치를 깍아내리려 든다.
그걸 수용하는 순간
본격적인 폭력과 착취가 시작된다.
우리는 결과로서 드러난 폭력이나 착취만 생각하지만
그 배경에는
위와같은 프로세스가 있다는걸 염두에 둬야 한다.
반대로 말하면
어떤 경우에서라도
타인이 멋대로 뒤집어씌운 프레임을
너의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어떠한 형태의 착취나 폭력에도 저항할 수 있다.
남이 만든 가치를
왜 너의 것으로 받아들이나?
나를 지켜주는건
역설적이게도
나 자신밖에 없다.
나 자신의 가치를
내가 인정하지 못할때
그 빈틈을 찾아들어
나의 빈공간에 너 대신 들어앉아 너를 조종하고 너 자신을 착취하려는 행위를
우리는
'세뇌'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는 폭력이나 종교적 세뇌는 오히려 작은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환경이 만드는
더 은밀하고
더 잘보이지않는
형태의 폭력과 세뇌다.
미국사회를 통해 세계적으로 큰 이슈를 일으키고 있는 인종차별이 대표적이다.
편견과 세뇌의 과정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게 아니라
사회와 개인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흑인은 어때서 안돼, 흑인은 뭐나 해야 돼. 흑인은 성적인 능력이 어때야 해. 흑인은 지적이지가 않아.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사회가 만들어가는 지독한 가치폄하
외모 (특히 키와 몸무게)
대학
남성여성 의 성별
기업형태
지방
직업
돈
사회가 만든 위 대표적인 편견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위 조건을 피해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통해 증명된다.
위 조건들을 잘 살펴봐라.
뭐 하나라도 걸리지않을 사람은 없다.
즉.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사람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게
위 차별의 허구성을 입증한다.
한국사회 저변에 딸린 차별과 혐오와 편견은
사람을 틀에 넣고 길면 길다고 자르고
짧으면 짧다고 늘려서 죽였다는
고대의 고문법과
다를게 하나도 없다.
개인이 만들었건
사회가 만들었건
어떤 형태의 편견과 프레임에도
절대로 너 자신을 내어주지 말라.
자기인식의 과정은 결국
위에 예로든
세뇌의 방향을 역으로 진행하면 된다.
역새뇌 라고 할까나?
세뇌탈출이라고 할까나?
이건 내가 만든 건데 어떠냐? 말이 좀 그럴듯하냐?
대상물색의 단계를 거꾸로 뒤집어서
스스로의 가치중에 붙잡을만한 가치를 찾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는 주변에 만연한 사소한 행복들 중에 즐길만한 행복을 찾아내는데 도가 트거나.
스스로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삶의 기쁨을 느끼는 일.
작은 일의 성취를 즐기고
그 속에서 나의 가치를 찾는 일.
이 일이 중요하다.
그 다음으로
가치폄하의 반대 과정으로
나의 가치를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 자신의 가치는 비교될 수 없는 것이고
우리 집 강아지가 못생기고 좀 평범할 순 있지만 내게는 세상 그 어떤 강아지보다 소중한 강아지이며
세상 어떤 어머니도 자신의 아이가 절대적으로 가치를 가진 아이임을 믿으며
다시 기회가 주어져도
그 평범하고 보통인 그 아이를
반드시 선택하는게
어머니의 마음 아닐까?
나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다.
정상적인 엄마라면, 자신의 아이를 몇백억돈과 바꾸라고 해도
절대로 바꾸지 않을거다.
그 아이가 특출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아이가 바로
나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 이와 같다.
그 누구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나는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 가치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회복하는 것.
이게 역세뇌의 두번째단계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폭력과 착취의 반대로
포용과 이해
소통과 배려
감사함과 가능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과감히 편견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가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거다.
나 스스로를 지키는게 이렇게 어렵다.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너와 나에게
용기를 내란 말을 하고 싶고
힘내란 격려를 해주고 싶다.
어찌보면 연극도
연기도
영화도
이런 마음에서 시작하는게 아닐까?
배우는 위로자라는 멋진 말이 있는데
나도 그런 용기를 내서
또 이 삶을 보다 가치있게 살기로
결심하는 아침이다.
모두 위로자로서의 예술가가 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오늘 포스트 한줄 요약
함부로 받아들이지마라
그게 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