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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고통과 예술의 등가원칙about, intheatre 2013. 11. 23. 14:25
요즘 푹 빠진 사진작가가 있다.
때마침 현재 대림미술관에선 그의 사진전이 진행중이다.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청춘 - 그 불완전성에 대한 작가
라이언 맥긴리이다.
우선 그의 사진 몇개를 보자.
작품에 대한 인상은 각자의 것이니 여기서 말할 것은 못되고
나는 청춘의 찬란함과 일탈과 불완전성에 대해 탐구하는 맥긴리의 사진들을 보면서
또 그의 인터뷰 자료를 보면서
청춘과 고통과 예술의 등가원칙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안톤 체홉의 갈매기를 가장 좋아한다.
수백편이 넘는 희곡을 읽었고
연극이론과 비평 등을 한양대와 한예종을 넘나들면서 공부했지만
그 수많은 희곡들 중
최고의 희곡은
무조건 갈매기였다.
체홉의 갈매기는
청춘에 대해 탐구한다.
중년인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 은
청춘인 니나와 뜨레쁠레프와 대립되는 삼각형을 이루지만
그 구도 속에서 조차
빛나는 것은
청춘이다.
늙고 소멸되어 가는 존재들은
오히려 더욱 강렬한 욕망으로
젊음을 탐하기 때문이다 ( 아르까지나, 뜨리고린 )
체홉이 바라보는 청춘의 특징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작품 속 청춘에 대한 묘사들은 다음과 같다.
불완전연소 (마치 갈매기 1막, 뜨레쁠레프의 불완전하게 연소되는 공연처럼)
내일을 모름
막연함
고통스런 축소
자기위안
질주
모순
방황
욕망
탐구
등등이다.
청춘을 두고 흔히들
찬란하다. 빛난다. 아름답다. 등의 용어를 쓰는데
그것은 말하자면 -
뒤돌아 서서 보는 청춘이다.
질주하는 청춘의 오늘에서는
그런 단어들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
승화된 자가
여유롭게
뒤를 돌아볼 때
느낄 수 있는 청춘에 대한 정의이지
청춘 그 자체는
고통이 뒤따른다.
체홉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시한번 위의 사진들을 보라.
내가 언급한
청춘의 특징들이 사진의 결 속에서
느껴지는가?
작가인 매긴리의 청춘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 시를 쓰고, 시를 쓰다 디자인을 전공했고,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사진을 찍다가 사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반드시 실수를 한다. 나는 그걸 포착하려고 한다'
'내가 젊은이들과 주로 작업을 하는 이유는...
실험적이고, 모험적이고, 반항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느 시대든, 어떤 환경이든 모두 다 고통스럽다.
어떤 삶을 살지 아직 결정을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내가 젊었을 때, 나 역시 젊음, 그 자체가 힘들었다.
모든 좋은 작품엔 고통이 동반된다.
자연스럽게 내 청춘의 고통이 작업을 통해 표출되고, 그럴수록 나 자신이 강해지는 걸 느낀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작품 또한 강해지면서
비로소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
(2013년 11월 대림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그의 사진 전시전을 직접 찾은 맥긴리와의 인터뷰 직접 인용)
청춘과 고통과 예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보다 더 명쾌하게 정리한 글을 본적이 있는가?
청춘은 고통스럽다.
결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정되어 있지 않기에
본질상 불안하다.
불안하기에
추구한다.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직 온전히 연소되지 않은 질주 (추구) 는
가끔, 사고를 부른다.
그래서
청춘은 위태롭고 위험하다.
예술의 속성 또한
동일하다.
예술 또한 고통스럽다.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규정되지 않기에
본질상 자유롭다.
자유롭기에
수많은 책임이 뒤따른다.
세상엔 공짜란 없으니까
반드시 그 자유에 대한 혹독한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예술가도 불멸을 추구한다.
아직 채 연소되지 않은 허무는 (인간은 본질상 불완전하며, 사회도 불안정스러우며, 인간의 존재 또한 그러하므로)
거의 대부분 사고를 부른다.
그래서
예술가는 때때로
단명한다.
그러나
청춘과 고통과 예술의 진짜 상관관계는 따로 있다.
그것은
족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자취를 남기는 것
또는 흔적을 남기는 것
그것이 청춘과 예술의 본질적 공통점이다.
청춘은 인간 인생의 어느 한 시기를 말하는 용어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과정성을 가진다.
과정은 곧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청춘은 결과로서 존재하지 않기에
가치가 있다.
청춘의 불완전 연소는
그의 인생 전체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큰 방황은 때로 큰 사람을 낳기도 한다.
터널을 질주하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듯이
청춘과 예술에서의 고통은
승화 된다는
매력이 있다.
맥긴리는
그 아름다움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이 단지 고통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아무런 자취가 남겨지지 않은
쓸모없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고통은
없다.
고통의 흔적은
더 높은 인식의 원천으로
우리 삶을 승화시킨다.
맥긴리는 그걸
강해진다라고 표현했다.
강해진다고 하면
근육운동이 생각난다.
근육운동이란
곧
인위적으로 근육을 찢는 것이다.
찢고
아물고
찢어지고
아물어지는
그 과정을 반복하며
근육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
바로 근육운동이다. (흔히 말하는 헬스)
그렇다면
당연한 결론을 낼 수 있겠다.
고통은 바로
성장의 원천이라고 말이다.
네가 청춘의 시기라면
너 자신을 돌아보자.
너는 고통스러운가?
상황이 고통스러운가?
마음이 고통스러운가?
둘 다 인가?
그렇다면
눈을 떠라 !
청춘은 곧 고통이란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고통스러운게 당연한데
고통스러운 것을 고통스러워하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아닌가?
고통은 그 자체로 가치중립이다
너의 선택이 가치를 결정한다
근육운동을 하면서 몸이 힘든 것을
가슴이 터질듯이 아파하고 좌절하는자 있는가?
때론 그 고통을
우린
즐기기도 하는 것 아닌가?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은 쾌감을 준다.
진짜 쾌감이 있는 것은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맥긴리의 언급처럼
반드시 그 고통은
무언가로 승화되는
원천이 되어야 마땅하다.
고통이 고통 그 자체로 끝나버리는가?
아니면
고통을 통해 무언가를 승화시키는가?
청춘의 기로는
여기에 있다.
너는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특히, 청춘이면서 예술가이기 까지를 욕망하는 너라면
선택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는가?
예술가는 어쩌면 변태이다.
-고통을 가까이 해야하는 운명이란 점에서 말이다.
나의 붉은 노트
멈출 수 없었던, 의지와 맹목과
다르게 느껴질 수 없는 그 어떤 시기,
그, 청춘이라 불렸던 눈 멀고 환한,
그토록 빨간 거짓말을 새파란 색으로 적어가는
순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청춘
다음은 없다. 이것이 청춘에 대한 합당하고 유일한 정의이다.
온 밤을 뒤져 단 하나의 감정을 찾아보지만,
나는 언제나 그럴 듯하게 실패할 뿐.
부정을 위한 부정, 생애를 위한 생애.
가치와 기준 따윈 없다. 그러니 가르치려 들지 말라.
천년의 바위가 되느니, 찬란한 먼지가 되겠다.
- 현재 대림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라인언 맥긴리의 전시회장에 적힌 시
맥긴리와 유희경 시인과의 협업을 통해 쓰여진 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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