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앞에 선 단독자
'신 앞에선 단독자' 라는 말이 있다.
사르트르에 의하여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명제로 정식화된 실존주의에 대한 입장은 제 1차세계대전 후 황폐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야스퍼스, 하이데거, 마르셀, 사르트르 등에 의하여 이론이 다양화되고 심화되었다.
실존주의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란 자기가 자신이 되려는 생성과정이라는 점과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의 주체적 결단을 강조하였다. '신 앞에선 단독자' 라는 표현은 위와같은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
예술가의 이미지를 생각해볼 때
누구나 독립적이고 개성강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실이다.
예술가는 그래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생들이
매우 의존적이다.
예술을 전공하겠다고 -
극작가, 연출가, 연기자,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왜들 그렇게 어머니들에게 의존하는지 -
알아보는 것도 어머니가 알아보고
정보도 어머니가 알아보고
그리고는 학생은 나한테 물어본다.
한예종 수능이 몇등급 나와야 되냐고.
학부모는 한술 더 떠서 꼭 물어보는게 있다.
될 것 같냐고. 올해 합격할 것 같냐고...
한예종 입시엔 수능이 안들어간다는 것쯤은
한예종 홈페이지 입시요강에 들어가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가고 싶다고 말하는 대학의
가장 기초적인 입시요강 정도도 찾아보지 않는 학생이
과연
'신 앞에선 단독자'로서의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예술가의 길을 헤쳐나갈 수 있겠는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핑계댈 수 없다.
이미 고등학생 중에서도 자신의 분야를 빨리 정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몰입속의 자유를 만끽하는 학생들이 많다.
게다가 나는 점쟁이가 아니다.
학부모들이 내게
우리 아이가 대학 가겠느냐 라고 물어볼때
나는 막막해진다.
우선은 학생의 미래를 너무 성급하게 단정지으려고 하는 학부모의 입장이 매우 부담이 된다.
내가 부담이 되는데
학생은 오죽하겠는가.
이 정도 대학을 갈 수 있다고 내가 말해준다면
그 학생에게 과연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일까?
아니면 최소한 그정도를 가야한다는 기대심리가
학생을 올가미 씌워 더욱 움츠려들게 할까?
결국 예술은 주체이다.
학생이 의지와 실력과 열정이 있다면
진실되다면 -
반드시 목표를 이룰 것이다.
예술은 주체적인 것이기에
결국
신 앞에 선 단독자로서
홀로 승부보고
홀로 싸우고
홀로 결과로 말해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이
바로 예술의 세계이다.
의존적이 될 때
이용당하게 된다.
아무도 의존하지 말라.
의존하니까 당한다.
예술은 니가하는거다.
어떤 연출가도 여배우인 너를 획기적으로 끌어주는 연출가는 없다.
네가 정말 단독자로서 확실하게 서 있는 배우라면
반드시 정상의 위치에 서게될 것이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누가 이끌어줘서 잘 되는게 예술이라면
그건 예술의 기본적 정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예술은 자기 표현이며
자아의 확장이다.
사회를 향해, 공동체를 향해,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 이전에 -
실존이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기에
너의 실존이 정리되어야 한다.
그것이 부조리에 대한 처절한 인식이라도 좋다.
그 부조리함이 먼저 정리되어야
그 다음 바깥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예술은 순서가 중요하다.
자아가 먼저고
그 다음이 바깥이다.
반대의 순서는 없다.
그러므로
연기의 세계는
결국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며 (한양대 연영과 교수 최형인)
방송과 영상의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며 (마셔 맥루한)
너 자신을 알라 라는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통찰인 것이다.
주체없는 예술은
껍데기고
쓰레기고
모순이다.
영혼없는 예술은
단 1초도 마주하기 싫은 혐오체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예술이란 이름으로
예술이란 포장으로
너의 영혼을 쉽게 타인에게 넘겨주지 마라.
세상은 너를 이용하려는 자들 투성이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자들을 조심해라.
그들이 널 황폐화시킬 것이다.
성공하려고 바둥대고
어떻게든 성공하려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반드시 상처받게 된다.
우리나라 예술계를 냉정하게 보면
영화인은 많고
연극인은 많지만
실제로 활발하게 작업하는 이들은
몇 되지 않는다.
1% 정도될까?
나머지는 대부분 영화인
연극인 이다.
이 부분에선 나도 할 말이 없다.
나도 찌질한 연극인일 뿐이다.
맞다. 인정한다.
나는 작품으로 결과를 낸 적이 없는
말하자면 잉태하지 못한
여인과 같은 예술가다.
제대로 된 예술.
확실한 예술세계를 갖추고 맹렬하게 돌진하는 예술가들은
사실
비본질에 자신의 에너지를 빼앗길 여유조차 없다.
계속해서 밀려드는 작품 스케쥴에
창작활동을 하기에도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예술가들은
그 어느 것 하나
새롭고
주체적인
창작작품 없이
그저
일 들어오면 하고
없으면 말고
전혀 도전적이지 않고
그저
비존질에 머물러
연극과 영화 주변을 서성인다.
말은 많으나
결과는 없다.
친구야.
자유라는 말을 오해하지 마라.
자유라는 말을 확대해석하지 마라.
예술적 자유는
영화인/ 연극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여러가지 사회적/ 도적적 규범에서 벗어나
자기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게 아니다.
적어도 예술 안에서 자유란
말하자면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 같은 것이다.
궁극의 몰입과 훈련과 뼈를 깍는 노력 이후에
오는
짜릿한 해방감. 몰입 속의 자유.
바로 그 자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 안에서의 자유란
승화이지
탈출이 아니다.
힘든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하는게 아니라-
힘든 현실 속에서 승화되어 피어오르는 것이
예술의 영혼이다.
왜 그렇게 의존적인가?
너를 획기적으로 이끌어줄 극단은 없다.
연출가도 없고
교수도 없다.
너는 네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네가 먼저 단독자로 서지 않으면
적어도 예술에선
그 누구의 도움도 너를 이끌어 줄 수 없으며
너를 성장시킬 수도 없다.
그게 예술이다.
단독자인 것이다.
네가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영어강의와는 다른 것이다.
영어는 좋은 강사를 만나
시키는대로 열심히 외우면
정답을 얻을 수 있겠지만
예술은 결국 너를 통해 표현되지 않는
모든
외부적 주입은
모두 비효율이며
오염이다.
그래서
네가 우리 학원에 오려면
신중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는데
단독자로서 충분히 서있을
용기가 있는 학생들만 와라.
학원에선
분명히 말하지만 단 한가지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직
이끌어줄 뿐.
자극과 동기와 경험과 전략을 제시해 줄 뿐.
결국
네가 해야 한다.
네가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레슨 포 케이아트는
방향을 제시하고 경험을 전수하고 자극과 동기를 이끌어주는 역할일뿐.
너의 예술을 만들어주고
너의 작품을 만들어주고
너의 입시를 만들어주는
학원이 아니다.
의존하지마라.
특히
대학에 의존하지 마라.
대학은 무책임하다.
대학이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선배들한테 물어봐라.
예술쪽 대학이
해주는게 뭐가 있냐고.
정말이다.
대학이 책임져 주는 건 없다.
기대하기에 실망한다.
기대하기에 몰락도 급격하다.
연기자의 꿈을 꿈고
연기과에 진학한 여학생들 중에
뜻에도 없는
유아교육과나
비서학과나
간호학과 전문대 등
소위 빨리 취직될 수 있는 분야로
급하게 바꿔서
순식간에 모든 예술적 가능성을 채념해버리는
학생이 매우 많다.
매우-
의존하고 기대하는 사람은
극과 극의 양태를 보인다.
위대한 안톤 체홉이
바로
갈매기의 니나를 통해
이런 현실을
처절하게 그려낸 것이다.
꿈과 환상을 가진 니나가
현실앞에서 뭉개진 뒤
급속도로 몰락한 채
인생 한자락을
부들부들 떨면서 붙들고 있는 걸 보라.
안톤 체홉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다.
친구야.
예술대학을 가서
절대적으로
예술적 몰입 속의 자유를 얻기를 바란다.
예술분야는
특히 대학생활은
비본질이 본질을 덮어 버렸다.
본질인
몰입은 온데간데 없고
선후배 기강잡기와
쓸데없는 술강요와
교수/선배들 수발과 (국악계가 아주 대표적)
얽히고 설킨 연애와
생계를 위한 낭비형 파트 타임잡 과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핑계대는
비본질이
본질을 압도한다.
결국 연극인/ 영화인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나처럼 말이다.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처럼.
너는 그래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내가 참 잘한 것 중 하나를 돌아보면
나는 많이 어설퍼도
일단 위로 올라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
더 높은 자리
더 가능성있는 분야에 뛰어들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가 착각하는게 있다.
잘해야 한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일단 올라가는게 중요하다.
인공위성이 그 우주 한 공간에 정확하게 도킹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심지어 우주정류장에
정확하게 도킹하는 우주선을 생각해보라.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조금만 어긋나도 우주 미아가 되서 산화된다.
인공위성은,
처음엔 대충 대기권밖
우주 어느 한 공간으로
적당히 방향만 잡아
일단 궤도권에 올려놓는다고 한다.
그리고 첨단 계측을 통해
궤도를 수정해가며
정확한 위치를 끊임없이 잡아가는 것이
인공위성이 정확하게 우주 한공간에
도착하는 비결이다.
예를들어 대학생활을 이야기해보자.
대학생활에서 시키는대로 공부를 잘한 것만이 그 사람을 성장시키겠는가?
아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는게 중요하다.
대학이라는 울타리안에서
어떤 삽질을 하든
모두가 다
유의미 한 것이다.
대학원도 마찬가지고
취직도
유학도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디아블로는 못잡아도
경험치는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잘하려고 욕심내지마라.
너한테 좀 벅차더라도
일단 해보라.
정주영회장이 한 이야기 중에
멋진 말이있다.
'해보긴 했어?'
해보긴 했냐?
잘하려고 하지말고
일단 해보는게 중요하다.
며칠전 학생 한명이
유학가기위해 어드미션에 추천서를 받기위해
나를 찾아왔다.
한예종에 떨어진 학생인데
이번에 미국의 SVA는 합격했고
플랫에 어드미션을 받기위해 찾아온거다.
매우 기뻤다.
박수쳐주고 싶었다.
그 학생이 그러더라.
전 세계 입시 중에 한예종 입시가 제일 어렵다고.
한예종 준비할 노력의 일부만으로도
해외의 수많은 명문대를 들어갈 수 있을거라고.
그래.
네가 예술가라면
비본질에
너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며
새로운 작업을 위해
너를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세계가 너의 앞에 있는데...
돈없어도
일단 여행비자로 미국가서
알바하면서
경비를 모아
언어과정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유학을 설계해보라.
좀 실패하고
좀 상처받고
좀 외롭고
좀 삽질해도
그 모두가 경험치이며
몰입속의 자유를 줄 것이다.
이제는 글로벌 시대.
전세계적 예술가들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이다.
너무 시야가 좁다.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보면
새로운 가능성의 바다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항해를 기다리면서
생각만해도 가슴 떨리지 않나?
대학에 너무 의존하지 마라.
대학이 너의 목적이 절대로 될 수 없다.
대학은 너의 단기목표는 될 지언정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대학 이상의 큰 꿈을 꾸고
주체적으로
너의 예술세계를 창조하라.
지금 이 글을 읽는 19세 학생이라면
네가 활발히 영화감독/ 극작가/ 연출가 등으로 활동할 나이는
대부분/ 거의 대부분이
2033년 정도가 되야 될 것이다.
친구야.
그때도 너는 39인데
39세에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
매우 빠른 것이다.
아직도 어린 감독인거다.
알겠는가?
2033년이 되어도
너는 아직 젊고
가능성을 갖고 있다.
20년전
1993년에는
오늘날의 현실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게 문화와 예술의 영역은
변화가 급속하다.
반드시 미래를 바라보고
변화를 예측해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대학은 이미
흘러간 정보들이 유입된다.
대학에 의존하면
늦다.
대학은 의존하는게 아니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2033년이 되면
세계적 장벽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
세계와 경쟁해야하고
성공한 예술가는 세계적인 예술가가 될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싸이가 나왔다면
순수예술분야에서도
그런 글로벌 경쟁이 본격화될 것이다.
노마드라는 말이 있다.
유목민이라는 뜻이다.
미래는 노마드들의 세계일 것이다.
어느 곳에도 안정은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너의 자리를 바꿔갈 수 있는
크리에이티브
그리고 순발력
그리고 통찰이 있는 자들이
세계를 집어삼킬 것이다.
이미 애플과
구글이
입증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결국 처음의 표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친구야.
'신앞에 선 단독자'로서
반드시 홀로 서길 바란다.
기대와 의존은 금물이다.
예술가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주체와 본질
그리고
몰입속의 자유를 누리자.
작은 실패에 떨지말고
더욱 더
너의 그릇보다 큰 세계를 향해
겁없이 덤벼들라.
디아블로는 못 죽여도
경험치는 남는다.
실패가 중요한게 아니라
경험이 남는다면 모두 성공이다.
결국 성공의 반댓말은 실패가 아니라
포기인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고
몰락이 급격하다.
그러므로
주체적이 되어야 한다.
정주영 아저씨의 말처럼
'자네. 해보기나 했써??'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한예종 잘 안되었지만
미국 최고의 명문예술대학인 SVA의 관문을 훌쩍 넘고
다시 플랫에 도전하는 학생처럼
실패를 더 큰 성공의 자산으로 삼는다면
모든 실패를
논리적으로
정당하게
필연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실패하지 않는 삶이다.
실패조차 성공의 자산으로 바꾸어버리는 사람을
도대체 그 어떤
운명이
가로막을 수가 있단 말인가 !
'신 앞에 선 단독자'
너의 몰입 속 자유를
맛보고 싶다.
꼭 내게 보여주기 바란다.
조용히 박수쳐주겠다.
어두운 객석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