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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가장 위대한 비평가카테고리 없음 2020. 7. 2. 04:27
남 말
별로 들을 필요없다.
일단 수준높은 사람은 조언을 잘 안하려하겠지
살다보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고
개인마다 다르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서
오늘날과 같은 사회에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준다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기 때문에
쉽게 조언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구건
조언 한답시고 자꾸 불러다가 말하는 사람치고
그닥 들을만한 말을 해주는 사람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 인생도 한치앞을 못내다보는데
누가 누굴 조언하겠나?
그러니 철저히 외로울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지고 개선이되는 스스로의 방식을 터득하는 수 밖에 없는거다.
네비게이션에 길들여지면 10년을 운전해도 길 하나 제대로 못보는 것처럼
남들의 조언에 의지하다보면
정작 내가 문제를 해쳐나갈 힘이 약해지게 된다.
나는
각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있어선 가장 위대한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나에 대해서 나만큼 잘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용기가 없어서 인정을 못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하게 한번 생각해보라.
정말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있는지, 내 잘못이나 단점을 내가 모르고 있는지
내가 지금 직면하는 문제들이 무엇때문에 발생된일인지
스스로가 정말 모르고있는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척 인정하지 않고있는건가?
그래서 발전하기 위해선
나 자신에게 있어서 무자비할 정도로 혹독한 비평가가 되어야 된다.
성공한 스포츠선수들을 보면
스스로에게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걸 볼 수 있다.
히딩크감독이 '나는 아직 배고프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계속해서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넘치는 사람은
스스로에 대해 정말 엄격하다.
나를 사랑한다는건
나의 잘못을 내버려두고
나를 스스로 안아주며
나는 나를 사랑한다고 위안하는게 아니다.
그건 학대다.
나를 사랑한다는 건
스스로에게있어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고 스스로에겐 무서운 비평가가 되어주고
스스로에게 체벌의 매를 기꺼이 들어줄 수 있는
무서운 훈련자가 되는게
어찌보면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는거라고 볼 수 있다.
꿈의 경우도 그렇다.
꿈의 과잉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꿈은 사실 꾸는게 아니다.
사람들은 꿈꾸라고 말하지만
꿈은 막연히 꾸고있는게 아니다.
꿈은 이뤄나가는 것이다.
꿈은 잠속에서 이뤄지는게 아니다.
꿈은 공상속 세계가 아니다.
꿈은 단순하다.
그저 현실의 결과일뿐이다.
꿈은 막연히 꾸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쟁취해서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좀 멀리있는 목표, 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여지는 것일뿐이다.
예를들어 어린 운동선수에게
올림픽메달과 같은거다.
현실이 될 수 있고, 쟁취할 수 있는 목표인데
좀 먼 길을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목표.
그런게 꿈이다.
현실이 쌓이면 그게 꿈이된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꿈 역시도
계속해서 수정되며 발전되어야 한다는 거다.
사람이 성장하면
꿈도 같이 성장을 한다.
영화에 대해 잘 모를때 학생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레드카펫이야기를 한다.
영화에 대해 잘 알게 됐을때
영화에 대한 꿈은
조금 더 현실적이 되고
조금 더 구체적이 된다.
재미있는건
꿈이 성장하면 할수록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것들에 주목하게 된다는 점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고 할까?
자연
가족
주변사람들
그 일 자체의 가치 (배우가 무대를 사랑하는 것 같이)
평범한 일상의 가치
봉사와 섬김
나눔
과 같은 그 본연의 가치로 회귀하게 된다.
사람이 성숙하면 꿈도 같이 성숙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상
지금 하고 있는 관계
지금 하고 있는 일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게되고
그 자체에 목적을 두게된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엄격해야 한다.
남의 조언을 들을 필요가 없다.
꿈은 꾸는게 아니라 이뤄가는 것이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온전하게 타인을 품을 수 있다.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은
오랜 시간 혹독한 현실을 거쳐온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마치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 '우나기'처럼
연어가
장어 (우나기)가
다시 돌아오는건
그냥 돌아오는게 아니라
성숙을 안고 돌아온다.
그런 연어와 장어가
산란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