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사람 (한예종 영화과, 영화입시, 한예종 연출과, 영화과 내신)2015 새로운 포스팅 here!! 2015. 3. 8. 05:39
온리 원에 대한 포스팅을 준비하며 이미지 자료를 찾다가
온리원의 저자이자 페이 팔의 창업자 피터 틸의 강연사진을 봤다.
연세대 대강당에서 진행되는 그의 강의엔 유명 정치인들, 또 유명 기업가들이 양복에 최대한 격식을 차리고 앉아 듣고 있었다.
그것은 기이한 경험이었다.
정작 강사인 피터 틸 자체는, 기업의 CEO가 수트를 입고 미팅장소에 나오면 그는 그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철학을 가진 매우 아방가르드한 기업가에 속한다.
게다가 하나의 대중강연일 뿐인데
그러한 강연을 소비하고, 관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또다시 새로운 보여주기의 일부이며
자신은 혁신적이며
트렌드에 뒤쳐지지 않는다는
한국인 특유의 노출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과연
미국식의 아방가르드적 혁신을 통해 한국에서 사회지도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나라 기업이 성공하기위해
피터 틸식의 접근이
과연 성공적일까?
최신 조선일보 색션에 피터 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와있는데
그 신문 첫번째면에는
조선일보의 창간 구십몇주년을 축하한다는 기사로 채워졌는데
그 기사 속 사진을 보며
그 리샙션장에 초대된
어울리지 않는 현란하게 밝은 색 (주로 페레가모 동물모양 그려진거, 근데 그건 격식있는 자리에 쓰는 넥타이가 아니라 소풍이나 나들이등 가벼운 자리에서 위트있게 표현하기위한 디자인인데...)
의 넥타이를 맨
한국 이란 사회의 지도층들
거대한 기득권 집단.
그들은 과연
혁신을 통해 한국이란 사회에서 기득권을 갖게 되었을까?
아니면
혁신과는 반대되는 무언가를 통해
기득권을 갖게 된 것일까?
계속 생각이 이어졌다.
피터 틸이 대단한 혁신가이며, 또 그의 주장은 매우 공감이 간다.
그래서 피터 틸에 대한 포스팅을 현재 쓰고있다.
그러나 피터 틸에 대한 포스팅을 쓰기에 앞서
지금 이 포스팅을 먼저 쓰려한다.
한국사람.
나는 독서를 좋아하고, 특히 경영학, 종교학, 예술, 희곡 등을 좋아한다. 그중 경영학 책을 많이 읽은것은 배운 여러가지 통찰들이 현재 경영하고 있는 경영방향이나, 또 여러가지 통찰에 직접적인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영미중심의 스타 경영자이자 작가들이 대부분인 경영학 서적들 속에서 느꼈던 느낌들이
한국에서 경영하고, 또 공부하며 현실과 맞닿았을때는
수없이 많은 모순과 충돌이 생긴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한국인. 한국사회. 한국이라는 사실.
이것을 깨달을 때
보다 더 성숙해짐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경영학 서적을
요즘에 읽으면
예전에 느꼈던 짜릿함보다는
무언가 먹먹함이 더 느껴진다.
괴리감이라 하는게 더 정확할 수도 있겠다.
자. 오늘의 주제로 바로 들어가자.
나는 한국사람이다.
이 글을 읽는 너도 아마 한국사람일꺼다.
내가 살아보니
제일 중요한 조건이
그거더라.
내가 한국사람이라는거
나는 그걸 절대로 벗어날수가 없더란 거다.
그걸
깨닫지않고서는
진정한 혁신은
힘들다는 것.
즉.
천조국의 멋진 실리콘밸리 아저씨들의 아마존이나 구글이니 그런 CEO들의 강연이나 책등을
아무리 봐봐야
한국적 현실 속에서
다시 재조합하고
다시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말짱 황이라는 거다.
니가 아무리 혁신적이라 해도
한국
이라는 환경적 조건이
훨씬 더 앞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한국적이라는거.
그거는
바꿔서 생각해보면 쉽다.
니가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라.
아니면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니가 졸라게 혁신적이고 대단한 노력가라고 생각해보자.
근데
니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났다면?
끝난거다.
혁신적이어서
너는 해적이 될꺼다.
엘리트 해적.
니가 혁신적인데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뭐 답 안나오지 않나?
그런거다.
말하자면, 환경이 혁신보다 힘이 크고,
너라는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란 사실이다.
피터 틸이라는 놈도 사실 뜯어보면
유태인이고
미국계 유태인의 그 목숨을 건 교육과 자기들끼리의 동족의식. 그리고 네트워크.
과연 피터 틸의 독점적 혁신은
그의 창조력에서 오는 것일까?
미국이라는 강력한 국가의 힘.
그 국가를 주무르는 유태인들의 네트워크라는
강력한 독점적 정보와 교육과 네크워트에서
훨씬 더 큰 영향을 받은 것일까?
주커버그 이런 놈들도 마찬가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까지 글을 보면
내가 꽤 자조적인 글을 쓰는 것 같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자조적인 글을 쓰고 싶지않고
우리네 현실 속에서
가장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같이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래.
나는 한국인이다.
그건 불변의 조건이다.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다.
불변의 조건과 싸우면
파멸한다.
왜냐하면 그 조건은 불멸이므로.
죽음과 맞써싸운 진시황의 승패는
그의 무덤이 증명해주지 않는가?
바꿀수없는 조건과 싸우는건 비극이다.
한국인이라는 조건 속에서
가치판단을 지나치게 할 필요는 없다.
항상 극단끼리는 통하는 법이다.
한국인에 대한 지나친 비하는
곧
한국인에 대한 지나친 국뽕으로 이어진다.
한국을 알린 자랑스런 한국인 싸이가 빌보드 2위를 했고, 메이저리그에서 류현진이 몇승을 해서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수치스럽다.
그만큼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
나는 한국인이다.
너도 한국인일 것이다.
그뿐이다.
내가 강조하는건
그것에 대해 가치판단을 지나치게 할 필요가 없고
그 속에서 어떻게하면 최선의 것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게
정답이라고 본다.
나를 알아야
남도 알고
세상을 보는 눈도 생기지 않겠는가?
한국인, 한국사회, 한국론...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은 너무나 거대하고 포괄적 주제이다.
나는 능력이 안된다.
다만
내 전공분야인 연극비평의 관점에서
한번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나쁜 사례
한국은 작다.
고추사이즈도 전세계에서 가장 작은 편에 속한다는 통계가 있다.
작은 나라다.
그걸 먼저 깨달아야 한다.
오죽 작은 나라였으면 거대함에 대한 욕망이 있어 나라이름 앞에 '대'자를 붙이겠는가?
대한민국.
어찌보면 열등감이 내재된 단어이다.
공연에 대해서 한정해 이야기 한다고 했으므로
나쁜 사례와 좋은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나쁜 사례 1)
렌트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은 그리스인데
렌트나 그리스 한국판 공연을 본적이 있나?
나는 EBS에서 녹화된 그리스 한국판 공연을 본적 있는데
보면서 좀 힘들었다.
연출이 동선을 만드는 것이
좌우로 흔들고
한바퀴돌고
한마디로
너무 유치했다.
왜냐하면 나는 한국판 그리스와 동시에
미국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캐스팅의 '렌트'를 동시에 봤거든. DVD로.
그러면서 느꼈다.
'함부로 따라해선 안되겠구나'
마찬가지로
거대 뮤지컬
'노테르담 드 파리'도
나는 프랑스의 오리지널 캐스팅 실황 DVD를 봤고
그것이 축소된 형태의 한국판 '노테르담 드 파리'는 공연장에서 봤는데
마찬가지로 형편없는 공연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외국 공연의 국내소개 정도의 의미외엔
대단한 의미를 주기가 힘들었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나는 프랑스 파리에 있었다.
파리의 노테르담성당을 가보고
루브르 박물관을 가보니
그러한 공간적,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게
공연이며
그것을 국내에서 아무리 흉내내도 원작의 거대함을 따라잡기는 역부족이라는 걸 느꼈다.
규모의 차이
역사적 배경의 차이
그런 것이 실존한다.
따라하기. 무분별하게 수입하기는 치명적으로 나쁘다.
예를들어 미스 사이공 같은 대형 뮤지컬의 원류는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기인하는데
가정있는 미군병사가 베트남여자를 맘대로 유린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데, 동양여자는 순정을 바친다는 내용속에는
서구중심적 이데올리기가 버젓히 노출되어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를 동양인 우리나라에서 세계 몇대 뮤지컬이라며 따라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2) 나쁜 사례 2 - 한국적인 것에 대한 오해
쓰기가 힘들어서 그냥 짧게 말할께
한국적인 것에 대한 오해에서 나오는
한국적인 것이 전부다 식도 곤란하다.
예를들어
최근에 한국의 선비문화를 오페라로 만들어 세계에 알린다고 국고 수십억을 지방자치단체가 지원받아 공연한 사례가 있다.
한국적인 것이면 다 된다는 것 역시
외국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과 똑같은 열등감의 표현이다.
2. 잘된 사례
그렇다면 잘된 사례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제일먼저 빨래를 손꼽고 싶다. 뮤지컬 빨래.
뮤지컬 빨래는 한국적인 것을 껍데기로 본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환경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한국적인 걸로 봤다.
한예종이 있는 석관동 근처의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
그것이 진짜 한국적인 거다.
한국적인 건
껍데기에 있는게 아니니까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진짜 한국적인 거니까.
취직문제, 또 외국인노동자문제, 노동문제, 장애인문제 여러가지 주제를 다루지만
공연은 심각하게 무게잡지도 않고 가르치려고 하지도 않고
객관적이고 균형있게 한국사회를 비춘다.
예를들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불법입국자인 솔롱고를 린치하는 한국인들이 실업자라는 설정이다.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다루지만 다분히 감정적이지않고
외국인노동자가 생김으로 발생하는 한국인실업문제를
아주 절묘하게 녹여냈다.
게다가 빨래라는 랑그와 파롤. 즉 기표적 빨래라는 소재와
의미. 즉 기의적인 씻어준다. 씻어준다 라는
형식적 중의성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무대 바깥까지 채우는 섬유린스 냄새로
관객과의 오감적 소통이란 면에서 공연성도 압권이다.
빨래는
한국적인 것을
단순히 한국적 소재를 다루는데 그치는게 아니라
한국적 삶 이라는 시선으로 다룬 명작이다.
빨래는 작은 공연이다.
그래서 한국적이다.
나는 대한민국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소한민국이면 어떤가?
강대국이 되는것보다
강소국이 되는게
더 우리 실정에 맞는것 아닌가?
그래서 노트르담 파리를 향해가는 것보다
빨래를 향해가는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어느게 더 가치적으로 낫다는게 아니라
전략적 접근을 말하는 것이다.
3. 또 하나의 잘된 사례
역시 이자람의 <사천가>가 으뜸이다.
한국적인 소재인 판소리와 브레히트의 희곡이라는
이질적인 조화를 창의적으로 선보였다.
한국적이라는 것에 너무 매몰되지 않았고 기발한 연극성으로 새로운 형식을 이쁘게 포장해냈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한국적이란 것을 깨닫는게
세계를 향해가는 첫걸음이다.
나는 한국사람인게 좋다.
프랑스에 가고
탄자니아에 가고
몽골에 가보니
나는 한국인임을 더 강하게 느낀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오히려 그 장점과 한계를 정확하게 인지해서
창의적인 생산에 활용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 달리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한국사람이다.
한국속에 세계가 있고
가장 좋은 소재는
우리 주변에, 내 삶 속에 있다.
한예종 영화과, 한예종 입시, 한예종 내신, 한예종 영화입시, 영화입시학원, 레슨포케이아트, 한예종 영어
'2015 새로운 포스팅 he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다 (한예종 영화과, 영화입시, 연기입시, 레슨포케이아트) (4) 2015.03.24 팔자는 있다 - 팔자와 카오스이론 (한예종 영화과, 레슨포케이아트) (2) 2015.03.11 온리 원 - 창조적 독점, 창조적 소수 (0) 2015.03.08 쓸데없는 경험하지 마라 (드디어 썼다) (11) 2015.01.16 싹싹함 - 공감,배려,존중의 원칙 (2) 201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