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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자들의 도시 ( 원제 : Blindness )비평하다... 2011. 2. 9. 16:45
눈 먼 자들의 도시 ( 원제 : Blindness )-원작의 충실한 압축본
intheatre
서스펜스의 거장 '히치콕' 에게 "「죄와 벌」을 영화화 할 생각이 없습니까? " 라고 물었더니 히치콕은, " 그 작품은 이미 완성되어있기에 제가 손댈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히치콕의 말은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수많은 영화의 역사들이 이를 서로 다른 입장에서 작품을 만들어왔다. 결론적으로는 각색의 문제다. 물론 후발 주자인 영화가 같은 식의 진행으로 원작을 넘어서기에는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 어차피 (훌륭한, 혹은 어떤 매력을 가진) 원작을 보고 같은 방향으로 진행한다면, 그 영화는 아무리 잘 만들어도 원작의 테두리 안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원작을 가진) 영화들을 보면 그 영화는 원작과는 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 주제 사라마구 ' 넘어서기
일단 소설은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다. '주제 사라마구' 가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여서가 아니다. 읽기 시작하면 손에 땀을 쥐면서 그 참혹한 장면 묘사들을 눈살 찌푸리면서도 멈출 수 없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지옥을 느끼기에 이만한 소설이 없고, 보고나서 이 전체가 굉장한 우화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한번 더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의 최대 강점은 스타일이다. 추상화된 인물과 배경, 문장부호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마침표만 있어서 읽다보면 그 자체가 혼란인 문체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소설 전반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강렬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이는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성공 여부는 한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과연 어떻게 소설의 스타일을 영상으로 표현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스타일을 대체할 영화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할 것인가?
영화화의 포인트, 시각화와 감정이입
엄청난 규모를 시각적으로 표현 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이 영화는 할 만큼은 했다고 말 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스케일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낸 영화의 장면들이 장관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폐허가 되어버린 도시를 표현해낸 감독의 연출력은 압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게 ‘시각화’를 하는 바람에 결정적으로 원작의 추상적인 인물과 배경이 사라져버렸다. 작품의 추상적인 설정들은, 시각화 되어버리는 순간 구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영화가 이러한 구체성의 예술이라면, 연출자는 당연하게 다른 스타일을 창조해야만 했지만(역설적으로 그것이 원작의 리얼리티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길이기도 하다), 영화는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기에도 벅차 보인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원작에서보다 훨씬 감정에 호소하는 장면들이 많다. 일단 가지치기를 하다보니 주인공 의사아내의 비중이 훨씬 커져 관객은 의사아내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자주 등장하는 '줄리안 무어'이 홀로 벽에 기대어 고뇌하는 미장센이 이 감정을 대변한다. 그리고 종종 등장하는 감상적이고 교훈적인 나레이션들, 음악, 무엇보다 격리시설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들은 과잉되었다.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묘사 때문에 상황의 잔혹성은 훨씬 줄어들었다.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하려다 보니 격리시설 내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특히 성상납 장면에서의 폭력성은 극한에 다다른 인간을 보여주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결국은 감독이 가장 의도적으로 드러내려 했던 부분, 유일한 ‘보이는 자’인 의사아내의 고통도 '어지러진 집을 치우는 가정주부의 고통' 정도로 떨어진 것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혼돈 그 자체를 표현하기 위해 원작에서 사용된 문장부호의 생략은 영화적 언어로 승화되지 못한 채, 영화 속에서 자취를 감춰 버렸다. 영화는 훌륭한 원작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그것을 따라가는데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껍데기만이 남은 영화가 되어버렸다. 영화 내에서는 눈을 감고 내면을 느꼈다고 말하면서, 실은 눈을 뜨고 각색해서 원작의 깊이감을 받아들이지 조차 못했다. 그래서 우화적인 원작의 본질, ‘상상을 통해 극대화되는 공포, 처절한 현실인식’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재난영화만이 남았다.
인간 안으로부터 시작된 재난
그간의 재난영화들이 자연재해나 외계인의 침공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에 반해 <눈먼 자들의 도시>는 재난의 근원을 철저히 인간 안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알아내는 순간 이 영화가 얼마나 '인류애'적인 영화인지 깨닫게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인간들은 '시력'보다 더 큰 것을 잃었다. 그것은 타자에 대한 '믿음'이다.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신에 대한 믿음' 같은 건 접어두자. 어차피 예수, 성모 마리아도 앞 못 보는 장님이다(영화 참조).
이 영화는 초반부터 철저하게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보는 관객조차 등장인물들을 쉽사리 믿기 힘들 정도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그 믿음을 잃은 자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얼마나 몰락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기 위해 재난에 빠진 인간들은 한 곳에 모이게 된다. 타자에 대한 믿음을 잃은 인간들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 이들은 스스로가 가진 권력을 이용한다. 오직 자신만을 보호하고 자신에게 좀 더 철저히 기댈 수 있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게 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제 3병동의 왕(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총이 있었고 그는 그 총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오직 그 자신만 보호한 결과는 영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제 3병동의 왕을 비롯한 믿음을 잃은 이들을 벌하고 있다. '타자에 대한 믿음' 또한 매우 인류애적인 가치다. 그것을 잃은 인간 또한 '삶의 의지'를 잃은 인간만큼이나 철저하게 몰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 인가? 생존자 일행들을 잘 살펴보면. 그들은 병동에서부터, 병동에서 탈출하고부터 이들은 서로를 굳건히 의지하게 된다. 마치 대안적 가족의 형태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그러한 의지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병동에서 고난을 겪으며 얼마나 서로에게 믿음을 갖게 됐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시력'이 허락된다. '타자에 대한 믿음'으로 지옥에서 생존한 이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될 것이다.
해답은 당신안에 있다
이 영화가 호평보다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높았던 가장 큰 이유는 영화가 소설을 영상문화로 새롭게 구현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소설의 충실한 재현에 그쳤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영화 <눈먼 자들의 도시>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의 압축본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교차로에서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이세야 유스케), 그를 도와주면서 차를 도둑질한 남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의 아내(키무라 요시노), 안과 의사(마크 러팔로), 간호사 및 진료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손님들. 영화의 묘사는 소설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으며, 심지어 눈이 먼 순서라든가 그들의 에피소드도 거의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가 자신을 도와주려는 사람에게 묻는다. “왜 출발하지 않죠?” “아직 신호가 바뀌지 않아서요”
모두 눈이 먼 사회에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 목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안과의사의 아내(줄리안 무어)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으며, 따라서 타인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혼자서 보게 된다. 그게 과연 행운일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점차 이성을 상실해가고 이성이 배제된 인간의 본성은 한 편의 지옥도를 만들어 간다. 수용소는 쓰레기와 더러운 오물로 뒤덮이고, 그 속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 힘과 무기로 권력을 장악하고는 식량배급을 이유로 재물과 성을 강탈하는 무리들. 수용소를 벗어난 안과 의사의 눈에 비치는 도시는 이미 거대한 쓰레기장에 불과하고 굶주린 개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뜯어 먹으며 살아간다. 물론 지옥이라도 악(惡)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어깨를 잡고 서로에게 지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시체 대신 눈물을 닦아 주는 개, 죽은 여인의 몸을 정성껏 닦아주는 여인들.
소설에서는 이곳이 어디인지, 이 사람들의 이름이 무엇이며, 이들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히스패닉인지, 동양인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눈이 먼 사회에서 이러한 구분은 필요가 없으며, 지구의 어떤 곳이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화에서도 이들의 외모를 제외한다면 소설처럼 별다른 언급이 없긴 하다. 그러니깐 첫 번째로 눈이 먼 남자와 아내를 일본인으로, 검은 안대를 한 노인을 흑인으로, 장관을 아시아계로 설정한 것은 소설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영상으로 옮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설정해야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이 상상력을 발휘한 지점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론 그래도 워낙 원작이 좋으니깐 기본은 한다. 다만,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실명한 자들과 보균자들과의 격렬한 대립이라든가 안과 의사의 아내가 거리에서 목격한 살벌한 풍경들이 좀 더 과감하게 담겼으면 어땠을까 싶다. 소설을 읽을 때 머릿속에 떠올랐던 풍경에 비하면 수용소나 거리의 모습은 좀 더 완화된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두 번에 걸친 내레이션은 더욱 이를 부채질 했다.
소설에서도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영화도 사람들이 왜 실명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을 이 영화의 단점으로 꼽는 사람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실명했다가 다시 시력을 회복하는 과정은 영화 <해프닝>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해프닝>에서 주인공은 “설명하기 힘든 자연현상인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끝이 나는 경우가 있다”며 영화의 결말을 알려준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그 모든 악몽은 별다른 예측 없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소설 또는 영화의 눈먼 자들의 도시는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해답은 관객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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