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 또는 상실의 구조화

'Fatherlessness' (체홉의 플라토노프)

 

 

 

by   intheatre 

 

 

1920년. 체홉이 죽은지 16년이 지난 어느 날, 체홉의 미발표작 한 편이 뒤늦게 공개되었다. 그가 십대일 때 쓴 미완성작 플라토노프는 제작시기 상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냐 아저씨>나 <벚꽃동산>, <세자매>, <갈매기>등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후에 나타날 걸작들의 '아버지'인 셈이다. 그런데 기록으로 남겨진 이 희곡에 대한 단서는 체홉의 편지에 기록된 'Fatherlessnss'라는 짧은 문장이 전부이다. 말하자면 '부성의 부재, 즉 아버지 없음'이다. 이것은 은유적이다. 다른 장막극들보다 먼저 쓰여진 작품이자 미완성된 채 발표조차 하지 않았던 작품이 이후에 발표된 어떤 작품과도 비견될 현대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은유이다. 세상에 눈 떠나가는 젊은 작가가 직감적으로 느낀 세상은 그렇게 상실로 가득찬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후 작품들에서 나타날 뜨레쁠레프의 방황도, 바냐의 자기혐오도 이 플라토노프에서 그 시원을 찾을 수 있다.

 

 

 

2009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유리 코르돈스키 연출로 소개된 <플라토노프>는 체홉의 이 작품들에서 부조리성을 읽어내 작품 속 '없음과 상실'의 의미들을 구조화하고 있다. 이 공연에는 없음과 상실에 대한 연극적 기표들이 넘쳐난다. 러시아 연출가 코르돈스키는 흔히 <플라토노프>로 일컬어지는 체홉의 초기 미완성작에다 아버지상실 'Fatherlessnss'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이를 다시 '난파된 배'라는 무대 언어로 번역해 냈다. 말하자면 이 플라토노프는 '없음과 상실'을 통해 현대사회를 은유하는 한 편의 시적 은유이자 연극적 구조화인 것이다.

 

 

 

 

 

 

무대 위에 가득 펼쳐진 '없음과 상실'의 기표들

 

 

 

긴 적막. 그리고 빛들의 흩날림. 사람들 손엔 폭죽이 들려있다. 폭죽의 빛은 무대 밖의 짙은 어둠과 대비된다. 폭죽놀이로 한껏 고무된 이들의 여흥은 여유있고 낭만적인 삶을 전경화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의 즐거운 축제엔 무언가 어두운 대비가 있다. 무대 뒤로 세워진 판자들, 객석에까지 연결된 줄 등은 이 공간이 실제 공간을 일차적으로 묘사한 것이 아닌 상징적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 공간은 무언가 현실과 괴리된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둠은 그렇게 내리고, 연극은 시작된다.

 

 

이 극은 부재, 즉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영원한 맹세도, 성실함도, 용기도 모두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무의미한 욕망뿐이다. 인생의 목표가 사라진 이들 뒤로 깊게 이어진 어두움은 이들이 고독과 절망을 견디며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무대는 난파선이다. 밧줄로 꽁꽁 묶여있는 통나무 배, 이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존재, 변화와 욕망을 지향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어쩌면 할 수 없는 이들의 내적 갈등, 한 곳에 영원히 붙들려있으면서도 움직이고 있다는 환상을 상징한다. 주인공들은 이 난파선을 타고 어딘가 안식의 세계로 향하고자 한다. 어디엔가 더 나은 삶이 있다고 믿으나 그 곳은 실제하지 않는 망상의 공간이다. 통나무로 엮어 만든 나룻배와 나무기둥, 밧줄, 몇 개의 의자들로 무질서하게 채워지는 무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불안과 파편화된 심리를 그려낸다. 주변과 격리된 나룻배 안에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타인에 대한 경계와 공격성을 늦추지 않는 인물들이 표류하고 있다. 이들은 꼬냑과 담배, 소소한 놀이들로 시간을 보내고 복잡한 이성관계를 일삼으며 자신들만의 궤변으로 대화를 채워나간다. 그들은 사랑할 수도 또 사랑받을 수도 없는 자신 속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이다.

 

 

 

 

 

 

 

 

 

 

아버지의 상실, 난파된 배에 함께 올라서다

 

 

특히 이 난파된 배는 무대 깊숙한 곳에서 객석 바로 앞까지 나와있다. 반파된 배의 뱃머리는 무대 안쪽을 향하고 있기에 이로써 표류한 배, 부유하는 배에 올라탄 것은 비단 배우들뿐만이 아닌 셈이 된다. 이처럼 객석에까지 그 의미가 확대된 무대에서 관객들은 무엇을 경험하는가? <플라토노프>의 나룻배에 승선함으로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관객들은 무대 밖 나룻배의 나머지 반쪽에 위치함으로써 무대라는 거울을 보게 된다. 무대라는 거울을 통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아버지가 상실된' 시대의 황폐한 풍경이다. 여기서 아버지의 상실이라 함은 이 세계에서 기존의 체계, 법, 권력, 혹은 진리, 근원과 같은 절대적인 권위, 수직적 질서 등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얼핏보면 극중 인물들은 '아버지가 상실된'공간, 다시 말해 절대적인 가치가 의미를 잃어버린 공간에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꼬냑을 가득 채운 술잔으로 장기를 두거나, 복잡한 이성관계를 맺거나, 궤변을 늘어놓는 식으로 무의미하게 삶을 연장해가며 끊임없이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극중 인물들이 불꽃놀이를 하다 하릴없이 텅텅 빈 양철통에 불꽃을 터뜨린다든지, 악기를 연주하기 보단 밧줄에 걸어둔다는지 하는 행위들은 근원적 가치를 상실한 시대에 느끼는 공허함을 연극적 상징으로 풀어낸 것들로서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아버지 세계의 부정은 특히 아버지 없는 인물이자 이 극의 주인공인 플라토노프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가시화된다. 극중 내낸 플라토노프는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병, 죽음, 채권자들, 소유지 매각 등 온갖 문제에 둘러써여 있었으면서도 존경받는 것처럼 죽은 아버지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맹렬하게 비난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플라토노프에겐 이미 희미해진 지 오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9년 전인지, 10년 전인지 플라토노프는 제대로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이처럼 아비 없는 자식 플라토노프는 전통적 가치에 대해 반감이 가득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권위에 거절당해 온 세대들이 이제는 역으로 아버지를 거부하고 있는 오늘날 현실과도 맞닿아있다고 볼 수 있다. 플라토노프 외에도 아버지와의 연결고리를 강하게 부정하는 인물로는 글라골리예프 2세를 들 수 있다. 그는 파리 여행 중 돈을 보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의자를 던지는 등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데 여기서 아버지는 권위를 상실한 채 돈으라는 한낱 물질적 가치와 등가인 존재로 전락한다.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장군부인에 대한 혐오스런 반응으로도 잘 나타나있다.

 

 

 

 

이처럼 온갖 종류의 권위가 상실된 시대에는 사람들의 욕망은 갈 곳을 잃고 떠돌게 된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치들이 힘을 잃자 그들의 욕망이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것이다. <플라토노프>에서 이 떠돌이 주체들은 욕망의 대상이자 목적을 찾아 나서는데 이런 경향은 특히 플라토노프의 여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인들은 플라토노프를 이상적인 존재로 여기고 자신의 욕망을 투영한다. 그러나 이런 이상과 목표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극중 축제가 끝나고 2막으로 전환되는 분위기는 이러한 몰락을 전경화한다. 1막 마지막 부분에서 노란색에서 차가운 색으로 바뀐 조명과 함께 나지막이 들려오는 현 음악은 플라토노프 식의 즐거운 축제가 이제 막을 내리고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을 것임을 알린다. 2막이 시작되면서 무대 위 애초에 바르게 놓여져 있던 의자들은 다리가 하늘을 향하게 뒤집어 놓여진다. 수직으로 세워져 있던 기둥들도 이제 서로 엇갈린 채 쓰러진다. 이처럼 무대장치는 보다 구체적으로 세계의 황폐함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자들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플라토노프에게 점점 더 지나치게 몰두하며 자신의 욕망을 끈질기게 투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순진한 처녀 그레코바는 플라토노프에게 "당신이 원하는 바를 나와 함께하자"고 하고, 부인인 샤사는 플라토노프가 그녀를 고작 유모로 취급하는데도 불구하고 "남편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라고 되물으며 고리타분한 사랑을 고수한다. 가장 현실적인 여자로 그려지는 장군의 미망인 안나까지도 종국엔 자신을 유혹하라고 플라토노프를 꼬드기는데, 플로토노프의 거절에 그녀는 술에 취해 "배운 것 없는 여자, 정해진 일이 없는 여자"라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한다. 욕망의 기표를 잃어버린 잉여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여자들의 모습은 특히 소피아의 경우에 극에 달한다. 플라토노프로부터 함께 도망가자는 구체적 약속까지 받았던 소피아는 플라토노프의 배신에 분노를 참지 못한다. 소피아는 플라토노프와 함께라면 일하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다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다. 그녀는 플라토노프의 마음을 돌려보려 바닥에 엎드려 자신의 긴 머리칼로 그의 발을 훔쳐내며 자신을 구해달라 애걸하지만 결국 거절당한다. 쏘냐의 배신감은 천식환자처럼 숨을 거칠게 내쉬는 모습에서부터 남편 보이니체프의 총으로 플라토노프의 머리를 겨누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점차 극대화된다. 마침내 욕망은 샴페인의 기포마냥 부글부글 끓다 결국 플라토느프의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플라토노프의 죽음 이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될까? 의사 트릴레치는 '죽은 자들은 파묻어버리고, 산 자들을 수리해야지!'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트릴레치의 말을 뒤로 하고 사람들이 플라토노프를 묻으러 무대 밖으로 나간 사이 무더운 날씨 속에 압력이 높아진 샴페인이 폭발하면서 이 공연은 막을 내린다. 무대 위 샴페인의 폭발은 켜켜이 쌓인 채 해소되지 못한 욕망의 대분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한낱 거품에 불과했던 플라토노프적 인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플라토노프>의 인물들은 방황하고 헤멜 것이지만 절대 그들이 구원받지도 못할 것을 연상시킨다.

 

 

 


 

 

 

 

 

 

행동 할 수 없는 그들, 그들에게 구원은 있는가?

 

 

 

 

우리 인생이 그런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바꾸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작품의 주인공 플라토노프는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더 중요한 일을 할 수도 있었던, 그러나 시골에 쳐박혀 평범하다 못해 한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이다. 그런데 체홉이 만들어낸 이 일련의 인물 군들 중 가장 먼저 이름을 등재시킨, 즉 모든 인물들의 아버지이자 원형인 플라토노프는, 총으로 쏴 죽이기는 커녕 덜컥 총을 맞고 죽기까지 한다. 참으로 허망하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는 것이 사실 우리네 삶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무대에 오른 <플라토노프>의 연출가 유리 코르돈스키는 "나는 아버지 세대를 원망하며, 그들의 부덕함 때문에 원죄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에 관심을 가졌다. 삶의 뿌리를 상실한 세대, 이전 세대와의 연계점을 잃어버린 고아, 사생아들이 내 작품의 주인공들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원작의 대사를 과감하게 덜어버린 공연 대본에 눈에 띄게 두드러지는 것은 부자들 간의 관계이다. 코르돈스키는 원작에서 특히 부자들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무대에서 모든 아들들은 분노하고 방황하는데, 그들의 방탕함과 악덕은 부모세대로부터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부모세대가 물려준 것은 저급한 욕망, 속악한 흥정,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계략이거나, 경제적 부채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들들이 왜 그렇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오만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왜 그렇게 쉽게 주저앉아 버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모순은 바로 끊임없이 흔들리는 정체성과 정신적 부박함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고자 왜곡된 자부심을 내세워야하는 그 혼란스러운 존재론적 조건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연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1막에서 관객은 참으로 혼란스럽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보이니체프 장군의 미망인의 연회를 찾아온 손님들은 흔들리는 땟목 위에서 열정적으로 떠들고 먹고 마시며 철학을 논하고 재능을 논하고 이상을 논한다. 그러나 그 모든 소동의 의미를 관객은 도통 파악할 길이 없다. 이 상황에서 겨우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친족관계나 친분관계 정도이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낼 듯 에너지를 뿜어대지만, 여러 겹의 밧줄로 묶인 땟목이 한 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다들 제자리에서 소동을 피울 뿐이다.

 

 

 

그 지루한 시간들의 의미를 관객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은 인물 개개인의 감춰진 면면이 하나씩 정리되고 파악되는 2막에 와서이다. 사랑이나 호감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계산과 장삿속에 불과했고, 이상이며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객기이거나 달밤의 열정에 불과했다. 가면이 벗겨진 현실은 술병이 구르고 먹다 남은 빵 접시가 뒹굴고 천식으로 꺽꺽대며 호흡곤란을 일으키거나 숙취로 어지러운 것이다. 그렇게 황홀하게 도취된 1막과 그곳에서 깨어난 2막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의미이다. 항상 사건이 일어나는 그 순간이 아니라 뒤늦게 깨닫기 마련인 바로 우리네 삶 말이다.

 

 

 

그런데 그런 삶에서 애써 벗어나지 않는 것이 탈출을 원치 않아서는 아니다. 우리들, 우리 모든 플라토노프들은 탈출을 원하지만 그저 행동할 수 없을 뿐이다. 그저 누군가가 와서 구원해 주기를 바란다. 여자들은 플라토노프에게, 플라토노프는 여자들에게. 결국 우리는 밧줄로 묶인 땟목일 뿐인 것이다. 그런 삶을 드디어 마감하게 된 플라토노프의 최후에 샴페인이 팡팡 터진다는 것은 참으로 은유적이다.

 

 

 

 

구원 없음을 통한 부조리적 세계관

 

 

 

 

결국 이러한 모든 설정들은 작품의 부조리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상실과 부재의 주제는 결국 부조리의 주제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플라타노프가 사유하고 있는 '없음, 부유하고 있음'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이 연출자의 의도였기에 연출자는 왜 삶이 지루한지를 애써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부조리성은 여기서 잉태된다. 연출자는 부조리성에 초점을 맞춰 '없음'과 '상실'을 현대인의 존재와 연결짓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작품의 모든 지점이 구원의 문제로 집약되는 가장 강렬한 메타포는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는 장면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이 장면은 일차적으론 성경에서 여인이 향유옥합을 부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예수의 발가락을 씻어주는 장면을 연상케한다. 또한 마라/사드에서 코데이가 머리카락으로 내리치는 장면도 연상케한다. 플라토노프를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단초는 결국,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자로 플라토노프를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가? 이 여자들은 진정 자기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으나 그 사랑을 플라토노프에게서 찾을 수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이 연극은 '허무주의'가 '실존'을 억누르는 해가 뜨지 않는 밤의 연극인 셈이다. 근원을 상실한, 이성과 의미를 상실한 그것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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