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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ival, 인생의 선형, 혹은 비선형 시간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하여2017 새로운 포스팅!! (new) 2017. 2. 15. 20:54
Arrival.
인생의 선형, 혹은 비선형 시간.
시간을 통시적으로 받아들이는 법에 대하여.
내가 바꿀 수 있는게 인생이지만 또한 내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삶.
.
오랜만에 글을 쓴다.
많이 바쁘기도 했고, 작년 입시실적을 정리하고 올해 새로운 학생들을 수업셋팅 및 강사진구성 등 준비시키느라 눈코뜰새없이 바뻤다.
그리고!
우리 레슨포 영화학원 선생님들과 같이 일본 후쿠오카지방 놀러도 다녀왔다!
여행기는 추후에 완성하도록 하고.
컨택트라는 영화 봤나?
개인적으로 제목이 참 마음에 안든다. 왜 그렇게 의역했어야 했을까?
영어원제는 Arrival이다.
영어 원래 제목을 반드시 그대로 사용했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외계인과의 접촉과 소통. 결국 자기자신과의 소통으로 귀결되는
어떤 종류의 신비로운 소통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면서도,
인생의 또다른 신비에 대해 속삭이는 놀라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시간의 통시성'이라고 말할만한 그것.
그 시간의 통시성을 향해 오늘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Arrival.
- 카이로스의 시간을 받아들이는 선택의 힘
결국.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통시성에 대한 내용이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함께 가는 것.
어쩌면 함께 공존하는 것.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해본다.
우리는 흔히 시간은 선형적으로 리니어하게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어렸을때부터 의문이었다.
왜 시간이 일직선일까?
과거가 내게 영향을 준게 있다면
그게 지금도 내 자아에 영향을 주고 있다면
그게 과거에 머무른 걸까? 아니면 과거와 현재는 동시에 공존하는 걸까?
내 첫사랑 이름은 한나였다.
포항동부국민학교시절. 아파트 옆집에 살던 여학생이었는데
그 친구는 이름을 Hannah 라고 썼다.
나는 되게 신기하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똑같은 이름이구나!
Arrival 에서도 똑같은 이름이 나온다.
그런 이름을 '회문'이라고 한다.
내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과거의 기억이다.
올해로 30대후반인 나는, 누군가의 엄마가되어있을 한나를 다시 만나도
아마 얼굴도 기억못할게 틀림없다.
이미 지나버린 과거이다.
그런데
한나와의 기억은 남아있다.
초등학교때 같이 떡뽁이를 사먹거나, 내가 잡은 대빵 큰 방아개비? 를 한나의 채집망에 넣어주거나, 몇달걸쳐 모은 병뚜껑중 제일 좋은 델몬트 병두껑을 선물해주거나
학교갈때 손꼭붙잡고 가던
그런 기억들.
그 기억들은 현재의 나에게 영향을 주는가?
그렇다면 그 기억은 그저 과거에 머무는 것일까?
아니면 아직도 현실의 나와 공존하는 현재진행형인 기억인 것일까?
저 하늘의 별은 무려 수백만년전의 과거에 보내진 빛이
이제서야 도착한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육체의 눈으로도
실제로 과거를 보는 셈이된다.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어 있는가?
달콤한 인생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병헌이 황정민을 죽이면서
"x같은 기억. 그게 지워지지않는거거든" 어쩌고 저쩌고 했던 대사가 있다.
아주 x같은 기억 다들 있지 않은가?
나도 있다.
악몽도 꾼다.
그런 기억이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가?
아니면 지금의 내 인격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는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파내버리고 싶다고.
이병헌의 말이 일리가 있다.
파내버리고 싶다.
나한테 잘못을 한 그 놈이 문제가 아닌거다.
그 놈이 내게 새긴 그 x같은 기억이 문제인거다.
그 놈의 기억은 바꿀수가 없는거니까.
미래는 어떨까?
미래를 알 수 있나?
삶은 정해져있나?
내가 바꿀 수 없는게 있나?
역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내가 바꿀 수 없는게 많다는 걸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는 걸.
살아보니 그렇지 않은가?
생각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게 많지 않다고.
내가 다 선택한 것 같은데
돌아보면
전부 내 선택이 아니라는 것.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인생이 매우 불공정하게 느껴질꺼다.
예를들어 보자.
열심히 노력해야하고
노력하면 뭐든 다 이룰수있고
이런식의 자기개발서나, 성공론이 유행이지만
사람들은 다 안다.
그것 일종의 상술에 불과하다는 것.
과연 뜻대로 되는게 인생인가?
우리는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예를들어보자.
국적이라고 하는 것.
이거 결정적이다.
이번에 김정일의 첫째아들 김정남이 독살당했는데
김정남을 죽인것으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 북한공작원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실제로 공작원들이 김정남 살인에 성공하자마자 바로 음독자살했을거라는 예측이 있는데
저 여자는 꿈이 없었을까?
저 여자는 인간살인병기로 훈련받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까?
그런데
그걸 성공시키고나서 자살하는 운명.
그걸 그녀가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선택당하게 만든 기구한 운명의 덫일까?
노력하면 된다고?
국적을 예를들면 끝난다.
노력. 다 필요없다.
너와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으면 끝난거다.
북한에 태어나서 노력하는게 중요한가?
북한에 안태어나는 운명이 중요한건가?
소말리아에서 태어나면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해적밖에 더 되겠는가?
나라가 망해버린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면. 네가 어떤 선택을 했건 상관없이 빵한조각 돈주고 못사먹을 현실속에 내던져지게 되었을것이다.
좁게 생각해봐도
내 부모
내 환경
내 외모
내 기질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치명적으로 중요하더라.
그걸 무시하는건
어리석은 일이더라.
작년에 너를 생각해보라.
작년에 네가 2017년 2월 15일의 어느날에
이런 블로그를 보고 있을거라고 생각이나 했는가?
우리 삶에서 제일 중요한 만남들은
전부 내 뜻대로 되는게 아니다.
부모와의 만남
아이와의 만남.
어쩌면 배우자까지도.
인생은 크다.
그리고 우리 생각보다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거대한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진인사대천명
사람의 노력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라.
하늘의 뜻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
그런데
인생에서 내가 바꿀 수 없는게 너무 많다는 것.
어쩌면
내가 죽을 날. 내가 어떻게 될지
모든 비밀들은 이미
하늘의 뜻에 따라 정해져있을거라는 것.
내가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의 개념이다.
성경은 시간을 두가지로 본다.
하나는 신의 주권적 시간 - 그것을 카이로스 라고 하고
하나는 인간의 시간 - 크로노스라고 한다.
실제로 성경에서 똑같이 시간으로 번역되더라도 원어는 완전 다르게 쓰인다.
신의 섭리와
인간의 선택이
공존한다고 본게
성경이 말하는 시간이다.
그리스신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카이로스는 그리스 신화 제우스의 아들이며 기회의 신이다.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선택이 인생을 좌우하는 기회의 시간.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벗어나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순간
그 시간은
카이로스가 된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이미 인간의 지성은,
시간을 통시적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다.
불교도 그렇고 힌두교도 그렇다.
이미 고등종교들은 시간을
다층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
왜 운명론적으로 환경의 중요성.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깨닫는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가?
내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할수록
내 자아가 명확하게 형성되어지기 때문이다.
긍정의 과잉은 붕괴를 가져온다.
어설픈 낙관론은 더 치명적인 독화살이 되어 내 머리를 관통한다.
살아보니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는게
행복의 첫발걸음이더라.
나는 자기계발서중에 그 책을 반대한다.
무슨 머쉬멜로우 어쩌고 저쩌고 하는 책 말이다.
한마디로 머쉬멜로우를 다 먹지말고
남겨두라는 내용인데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오늘 먹어야 할 분량의 머쉬멜로우는
오늘 다 먹어야
그게
행복한 삶이라고 말이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나은 인생을 위해
더 좋은 성적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고
오늘을 쥐어 짜내고...
그런데 허무하다.
돈에 성공에 높은곳에 목표를 두면
반드시 허무함을 느끼게된다.
돈을 예로들면, 돈은 숫자거든
5백만원보다 500억이 반드시 더 큰 숫자이다.
5백만원보다 500억이 더 가치가 있다.
그것은
너무나 이데아적인 숫자. 반박할 수 없는 객관성을 가진
숫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학원 경영하고 열심히 살아서 최대치로 벌어봐야
부동산이나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서 놀면서 버는 돈이 훨씬 더 많다.
내가 500벌면, 누군가는 놀면서 500000을 번다.
그런데 내 500이 훨씬 더 가치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돈은 숫자거든
무조건 500보단 500000이 더 가치있는 숫자이다.
(무슨소리냐. 사우디왕자의 100억보다, 아름답게 기부하는 500만원이 더 가치있는 돈아니냐...라고 반박하지마라. 나는 어떻게 쓰여진 주관적인 돈을 말하는게 아니다. 돈 그자체. 숫자 그자체로 500보단 5000000이 가치있다는 말을 하는거다)
자본은
불공정하다.
돈뿐만 아니라, 능력도 환경도 타고난 것도 심지어는 결정과 선택조차도
완벽하게 불공평한게 인생이다.
생각해봐라.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청춘들의 시간.
한시간에 얼마를 버나?
근데
건물주는 앉아서 한시간에 얼마를 버나?
비교해버리면
건물주에 비해 수백분의 1도 안되는 가치를 가진게 청춘들의 시간이란 말인가?
인정해야 한다.
삶은 불공평한 것이다. 어찌보면, 모든 인간의 실존 자체가 불공평하다는 면에선 공평할 수가 있겠다.
어떤 삶의 기준에서도 만족이란 있을수 없다. 모든 것을 가진 인간이라도, 늙으며 죽게 되어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며, 한계를 가진 존재이며, 서로 돕고 채워야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 거다.
정리해보자.
내 몫.
내 한계.
내 삶의 운명.
거대한 하늘의 뜻.
신의 뜻.
주관적인 섭리.
그것을 믿고, 그것에 내어맡긴다는 건
그 만큼
내 삶을
탄탄하게 만들어준다.
내밀하게 만들어준다.
예를들어
내 강아지.
못생기고, 팔아도 돈도 안되고, 사실 객관적으로 잘난건 아니지만
이 강아지는
어떤 특별한 카이로스의 시간.
어떤 특별한 섭리에 의해
내게 주어진 선물이다.
라고 인식하게 된다면.
이 강아지는 세상 제일의 강아지가 된다.
그래.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난게 신의 뜻이구나.
라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삶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애써 껴안을
용기가 생겨나게 된다.
종교의 힘은 어찌보면 이런 식의 작동원리이다.
카이로스에 대한 인식.
그것이
내 자아를 형성시키고
나를 더이상
비교와 파괴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지않을
정신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내 삶의 조건들
운명들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해하고
마음을 열고
감싸안고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가 않다.
나의 고유성.
나의 유한성.
나의 못나고 못 미치고 실수하고 망쳐버리고 실패해온 내 삶 조차
어떤 거대한 섭리 속에 있고
그것이 나를 형성하는 것이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카이로스의 시간이라면
어떤 실패, 어떤 연약함, 어떤 상처조차
극복할
존재적인
근거를
확립하게 된다.
Arrival.
- 현재속에 이미 존재하는 미래.
오늘의 중요성.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는 최선을 다해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현재 속에는 이미 미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식물을 보면 알 수 있다.
빛을 충분히 받는 식물과
빛을 못받는 식물을 생각해보자.
현재 속에
이미
미래가 들어가있다.
너의 현재는
너의 과거가 쌓여서 형성된 것이며
너의 미래 역시
너의 현재에
이미
들어가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간의 미래는
바뀌게된다.
미래는 먼 곳에 있는게 아니다.
미래는 이미
현재 속에 있다.
신비롭지 않은가?
나의 미래는 내 손안에 있는 것이다.
내 현재 속에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많은 부분
내 의지와
내 선택과
내 노력에 의해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신의 능력을
일부 나눠가진거라 봐도 좋다.
그만큼
오늘의 나는
중요하다.
반기문이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는 그의 '오늘'이 있었기에 (정치적인 판단을 따지지말고 )
때마침 동아시아에 배정이 된 UN사무총장의 기회를 놓치지않고
UN사무총장이 된
미래가 있게 된것이다.
세상 모든건 변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우리나라가 바뀌었다. 시설, 도로, 공항, 자동차...
그런데 그게 바뀐건가?
자동차도 예측가능한 선에서 바뀐거고
도로도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한거다.
그런데 과학, 기술적 발전은 선형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뀐것 뿐이다.
오직
인간만이 비선형적으로 바뀐다.
몰락할수도
발전할수도
있다.
다시 생각해보자.
사회가 바뀐건가?
아니면
나 자신이 바뀐건가?
변하는건 세상이 아니다.
가장 많이 변한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가장 놀랍지 않나?
인간의 능력 중 가장 큰 능력은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란 점이다.
그것이
과거로부터의 운명을 벗어나고
현재와는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다.
.
성경은 그래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시간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통시적 시간.
카이로스와 크로노스가 공존하는 시간.
신의 섭리를 인정하고 그것을 맞아들이는 것과
한편으론
현재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것!
이 것은
통시적/ 비선형적으로 공존하는 시간의 신비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이다.
영화
Arrival이 말하는 궁극적인 메세지가 이것이라고 본다.
바뀔 수 없는 운명 속 시간.
그러나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가치있게 선택하고 가꿔가는 시간.
시간의 통시성.
그리고
그 속에서의
만남들에 대하여 -
시간의 통시성을 이해하고나서야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 대한
시야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아직 자녀가 없으니
우리 곁에 있는 강아지를 생각해보자.
세상 다른 이쁜 강아지들과 비교해 별로 대단할 것도 없고
어쩌면 많은 사랑을 줬는데 몇달후에 죽을 수도 있는 이 존재와의 만남.
이 강아지의 운명을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내게 주어진 존재라는 선물 앞에서
최선을 다해
현재를 가꾸는 노력을 다하는 것.
강아지를 씻기고
산책시키고
목욕하고
장난치고...
생긴것과 상관없이
비교할 필요도없이
내게 있어서
정말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어느날...
홀연히 그 존재가 내 곁을 떠나더라도
그 아픔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용기
너와 나의 정해진 때가 여기까지구나
그래도 너와 함께였어서 행복했고
너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단다...
말해줄 수 있는 용기
그런 용기는
시간에 대한 이해에서 맞볼 수 있는 가치 아닌가?
Arrival은
시간의 통시성에 대한 영화이면서
그 시간 속 만남에 대한 영화이며
결국
용기를 통해 이어진
만남.
즉
사랑에 대한 영화 아니던가?
용기를 통해 이어진 만남이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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