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래를 보는 사람과, 현재로 미래를 보는 사람2016 포스팅 2016. 5. 3. 00:10
몇주전부터 구상하던 포스팅 주제인데
오늘 기회가 되서 써본다.
주변을 보면
미래를 보는 사람은 많다.
우리 집 주변엔 탐앤탐스 카페가 있는데
새벽늦게까지 영업하는 유일한 카페이기에 자주간다.
탐앤탐스에 앉아있으면
여러 인간군상들의 사는 모습을 엿보게된다.
특히 내가 가는 탐앤탐스는 신사역 주변의 탐앤탐스라
주변에 유흥업소에서 한잔 걸치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경상도 억양 빡빡스면서 (나도 경상도다)
새벽에 카페에 앉아 과장된 몸짓과 함께 큰소리로 떠드는 아저씨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면
전부 미래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사업이 앞으로 떼돈을 얼마나 벌게될지...
사둔 땅이 앞으로 얼마나 오르게될지...
이 사업이 지금 돈을 얼마나 긁어모으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고 저떻고...
인간군상들의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있으면
모두들 잘나가는 비지니스맨이다.
전부 앞으로 잘되리란 믿음을 가지고있고
전부 장황하게 앞으로의 희망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그렇게 전망좋은 사업이 많은데
우리 현실은 왜 이 모양일까?
아서 밀러의 대표작 <세일즈맨의 죽음>을 좋아해서
희곡을 수십번 넘게 읽었다.
최근에 한태숙연출가가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세일즈맨의 죽음> 도 당연히 챙겨봤다.
매우 실망했다.
나는 영미문학회의 극회연극같은 <세일즈맨의 죽음>을 기대하고 예술의전당에 간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연에 대한 리뷰는 차차 하도록 하고,
어쨋든
아서 밀러는 바로 이런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단순히 미래를 보는 사람과
현재로 미래를 보는 사람에 대해서...
작품속 윌리는
그의 아들들인 비프와 해피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언제나 막연히 너는 잘될거라고 말하지만
잘될 수 있는 현재의 댓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비프가 사소한 물건들을 훔치기 시작했을때.
수학과목에서 낙제를 했을때
그 어떤 책임의 순간에서도
윌리는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현재를 보게하지 않았다.
그 댓가는 참혹하다.
비프는 극의 마지막에서
아버지에게 비수같은 말을 내뱉는다.
'1달러짜리 인간이라고
더는 못받아봤다고.
아버지도 마찬가지라고 !'
'제발 그 헛된 꿈에서 깨어나게 해줄 순 없나요...'
아버지를 붙잡고 울부짖는 비프의 대사는
현대적 비극을 새롭게 정의하는
놀라운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명대사이다.
단순히 미래를 보는 사람은 많다.
꿈꾸는 사람은 많다.
우리는 당연히 미래를 봐야한다.
그러나
미래를 보느냐, 안보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보느냐가 중요한거다.
단순히 미래를 보는 사람은 많다.
그 어떤 사람도
어떤 남자도
여자앞에서 미래에 대한 허풍은 떨수 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사람은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본다.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보는 사람은
인생이 달라진다.
나의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이 현재가 바로
곧 다가올 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는
나의 과거가 쌓여서 만들어진것이다.
나와 여러분의 두툼한 뱃살은
나와 여러분의 과거가 만들어낸
확실한 결과물이다 ^^
나는 서울대 나온 사람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사들이 돈 많이 벌어야 된다고도 생각한다.
그들의 과거가 그들의 현재를 만들었으니
그들의 현재는 당연히 차별화되어야 한다.
그들의 과거에 쏟은 노력의 댓가가
오늘의 모습이라면
공부 열심히 한 학생의 오늘은
공부 열심히 안 한 학생의 오늘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제의 노력이 쌓여서 현재가 만들어진 거라면,
현재의 차별을 깨끗하게 인정할 근거도 거기에 있다.
오늘 내가 좀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왜?
오늘 내가 변하고
오늘 내가 쌓아나가면
반드시!!
미래는 !!
바뀔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그걸 믿는다.
오늘이 바로 내일을 바꾸는 가장 확실한 시간이라는 것을.
오늘의 나를 보면
미래의 내가
거울 속의 나 처럼
너무나도 명확하게 보이니까 !!
미래를 보는 올바른 방법은 단 하나다.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보는 것.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만이
밝은 미래
변화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미래는 꿈꾸는게 아니다.
미래는 확실히 바라볼 수 있다.
단순히 꿈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거다.
먼 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보인다.
별이 수억 광년 떨어져있다는 말은
수억년 전의 모습이 지금에서야 보인다는 말이다.
놀랍지않나?
너는 이미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보이는걸 물리적으로 체험하고 있는거다.
별이란게 그런거라니까!
과거 수억년전의 빛을
지금 현재에 너는 바라보고 있는거라고.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분리된게 아니다.
하나이다.
너의 과거의 연장이 오늘이고
현재의 너의 연장이
너의 미래이다.
잔인한 인과의 법칙이다.
현재로써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함부로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내가 미래에 어떤 사람이되고
이 사업이 어떤 수익을 낼꺼고
앞으로 어떻게 부자가 될지를
앞서 말하지 않는다.
진짜 앞으로 부자가 될 사람들은
어떤지 내가 확실히 말해줄께.
진짜 앞으로 부자가 될 사람들은
부자가 될 미래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들이 아니라
앞으로 부자가 될 바로 그 아이템이
투입한만큼 산출되는게 보이므로
그냥
그걸 X빠지게 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면
부자가 된 삶을 그리는게 아니라
부자가 되는게 확실한 그 무엇을
지금
뭐 빠지게 졸라게 하고 있단 말이다.
공부잘하는 애들이 공부 잘하게 될 자신을 그리는게 아니라
공부하면 그게 공부 잘하게되는거니까
그냥 미친듯이 공부하는것과 똑같다.
안톤 체홉은 우리가 잘 알듯, 위대한 극작가이다.
인간에 대한 그의 통찰이 거대한 공감을 주기에
우리는 체홉을 사랑한다.
그 유명한 체홉이
인간유형을 어떻게 나누는지 살펴보면
오늘 포스팅의 주제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체홉은
인간을
악인과 선인으로 나누지 않는다.
애시당초 체홉이 보기에
모든 인간은
선과 악. 꿈과 희망. 기쁨과 슬픔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절대로 나눌수가 없다.
그러나
체헙은 작품을 통해
확실하게 차별화한다.
단순히 미래만 바라보는 인간과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보는 인간 유형을.
흘러간 과거를 붙잡고. 변화되는 미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꿈 만 꾸는 유형의 인간들과
현재를 붙잡고 미래를 자신의 것으로 장악해나가는 현실인식적 유형의 인간들...
로빠힌과 나타쌰
그리고 벚꽃동산의 모든 귀족들의 대비를 보라.
체홉에 의하면, 인간은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되는게 아니다.
현재를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느냐,
아니냐로
구분지을 수 있는것이다.
이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2016년 5월 2일 오후 11시 56분의 나는
글 하나를 썼다.
이 글 하나가 오늘 내가 쌓은 현재의 나이다.
이 글 하나가
곧 다가올 나의 미래이기에
이 글 하나를
허투루 쓸수가 없다.
이 글 하나가 모여
나를 만드는 것이고
나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기에
오늘 하루의 삶.
아주 사소한 일상이라도
그냥 놓치고 살수가 없다.
미래는 그냥 꿈만 꾸는 자의 것이 아니다.
미래는
현재를 통해 꿈꾸는 자의 것이다.
현재가 곧 미래임을 인지하고
오늘 하루의 삶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이미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의 것이다.
이미 증거를 얻은 것이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것이다.
이미 현재속에서
미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
성경 히브리서 11장의 그 유명한 믿음 장 또한
똑같은 말을 증거한다.
이미.
증거를
얻은 것이다.
이미 실제로 보고 있기에
(앞서 언급한 수억년전의 별을 지금 현재의 시공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증거를
이미.
우리는
얻은 것이다.
내가 운영하는 학원. 레슨포케이아트의 미래를 당연히 나도 생각한다.
수많은 학생들의 미래가 걸려있는 이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수업하고, 최선을 다해 좋은 선생님들에게 일을 위임하고
최선을 다해 연구하고, 최선을 다해 글을 쓰고
오늘의 내 모습이
곧
나와 내가 대표로 있는 사업체의 미래의 증거라는 믿음은
오늘 하루를
결코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지 않는다.
나와 여러분이 오늘 하루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정당한 증거가 될 수 있도록
하루하루 산다면
세상에 무서운 일이 뭐가 있을까?
실패조차 두렵지 않지 않을까?
어차피 인생은 과정이고
과정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미 오늘하루.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것. 죽을때까지.
그게 산다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 직업에 대해
내 가족에 대해
내 아이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내 꿈에 대해
그저
내 힘이 다할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사랑이고. 그게 삶이 아닐까 한다.
정말 귀한 건, 결말이 없다.
아이를 키워서 어떤 결말을 얻을 수 있을까?
아이가 판검사되면 그게 좋은 결말을 얻은걸까?
그럼 판검사되면 끝나는건가? 그건 오만이다.
사랑의 결과는 무엇인가?
결혼하면 사랑은 결과를 낸거고 끝난건가?
사랑의 결말이 무엇일까?
사랑은 영원한 동사가 아닐까?
사랑한다...라고 하지 사랑했었다. 라고 사랑에 대해 끝내버리는 순간. 사랑은 죽은 단어가 되어버리지 않는가?
우리의 꿈의 결과는 무엇인가?
배우로서 성공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아카데미상을 받으면 성공인가?
끝나는건가?
과연그럴까?
진짜 귀중한 건
결말이 없다.
오직 과정이 연속될 뿐이다.
'2016 포스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죽도록 힘듦의 다음단계 (0) 2016.10.23 나만의 것 (0) 2016.09.08 가난에 대한 스토리적 접근- 연극영화입시 (1) 2016.04.28 연극영화 Q&A시리즈2- 나는 할 수 있나요? , 재능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0) 2016.04.26 Q&A 시리즈 1) 현장에서 큰다는 말의 함정 (2) 201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