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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드와 인물의 성격화에 대해 (한예종 1차, 한예종 극작연출, 영상원 영화과)all about story-telling 2013. 6. 28. 00:43
요즘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수업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멕베드를 통해 인물의 성격화에 대해 알아보자.
스토리 이론으로 본 맥베스 / 플롯과 인물의 성격은 동일어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 이론에서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바로 스토리의 구성에서 플롯은 곧 성격과 같은 말이란 거다.
놀랍지 않나?
그럼 이상한거다.아님 스토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거거나.
나도 스토리를 쓰는 초기엔, 스토리의 구성에서 플롯과 인물의 성격화는 언제나 따로 노는거라고 생각했다. 인물의 성격화를 플롯 속에 삽입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외적인 사건에 집착하게 되었다.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더욱 자극적인 사건이 필요했다. 이건 마치 빈곤의 악순환과 같아서, 자극적인 사건은 더욱 자극적인 사건을 필요로하고, 그래서 스토리는 살인과 강간과 방화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언제나 신선한 소재에 골몰했고, 언제나 무리수를 뒀다.
한국영화 중 수많은 스릴러들이
또는 장르물이
또는 공포영화가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이며
반복하는 있는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바로
스토리의 구성에서 플롯과 인물의 성격을 따로 본다는 것.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그러나, 로버트 맥키에 의하면, 스토리의 세계에서 플롯과 인물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같은 거다.
마치 아버지가 남자이고, 남자가 아버지인 것 처럼.
또는 아버지가 아버지이지만, 할아버지에게는 아들인 것 처럼.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진실로 플롯과 인물의 성격화는 같은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스토리는 인간 삶에 대한 메타포이다.
스토리는 인간에 대한 것이다.
연극에서 필수요소에 대한 고찰이 있다.
연극에서 빼도 될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빼도 되는 모든 요소를 다 제외하고 남은 것 만을 남긴 연극의 형식을 최소주의라고 한다.
바로 그로토프스키의 '가난한 연극'을 예로 들 수 있다.
연극에서 의상도 필요하지 않다. 벗고하면 되니까, 조명? 햇빛이 있으니까 괜찮다. 연출가? 없어도 된다. 배우가 연출가의 역할을 하면된다. 대본이나 텍스트? 당연히 없어도 된다. 즉흥연극으로 하면 되니까...
그러면 결국 연극에서 남는 것은
퍼포먼스를 하는 자와
그것을 보는 자
이 둘만이 남겨지게 된다.
즉, 그로토프스키는 연극의 본질을
배우와 관객. 이 둘로 한정지었고, 이 둘의 관계성을 특별히 드러낼 수 있는 연극을 고찰했다.
그것이 바로 '가난한 연극'이다.
스토리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의 공식을 적용해보자.
스토리에서 빠져서는 안될 단 하나의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 삶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메타포가 바로 스토리의 최소 성립 조건이다.
예를들어,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지구 멸망 후를 다룬 다큐멘타리를 보자.
인간이 지구에서 모두 사라진 후, 지구가 변해가는 모습을 다룬 그 다큐멘타리의 경우도
결국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이 담긴, 인간에 대한 하나의 메타포임을 볼 수 있다.
인간이 비어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절실히 변해야 한다는
인간성 회복에 대한 절실한 충고 아니겠는가.
즉 모든 스토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버트 맥키에 의하면, 인간의 성격은 인물묘사와 다르다고 한다.
인물묘사는
밥 먹는 것. 싸는 것. 밤에 뭐하는 지. 흑인인지. 손가락은 긴지 짧은지. 옷차림은? 나이는? 대머리인지? 남자인지? 호모인지?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용어이다.
심지어는
화를 잘 내고 흥분을 잘한다는 설명도 엄밀히 말하면 성격이 아니다.
그것도 인물묘사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성격은 무엇인가?
성격은 인물이 어떤 '사건'을 마주했을 때 발생된다.
어떤 사건에 대한 행동방식. 또는 행동양태를
우리는 성격이라고 한다.
즉. 누군가의 성격을 말하기 위해선
사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변호사가 있다고 해보자.
수트에 포켓치프에 몽블랑 만년필을 꼽았고 에쿠우스를 몰고 있다. 신발은 방금 닦아서 반질반질하다.
그는 누구를 만나고 점잖고, 공손하다. 그리고 예의바르다. 그 누구에게도 예를 갖춰 대한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점잖고 젠틀한 사람인가? 인물묘사는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는 점잖은 성격인가?
아니.
우리는 모른다.
그가 어떤 성격인지는 우리는 아직 모른다고 말하는게 정확하다.
단지 그의 인물묘사에 대한 정보만을 들었을 뿐이다.
또 한 명의 인물을 생각해보자.
그녀는 중년의 가정부이다. 방금 청소를 끝내고 지친 몸으로 버스를 탄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이 인물의 성격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성격은 이럴때 나타난다.
두 인물이 동시에 한명은 에쿠우스를 한명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눈 앞에서
유치원 버스가 전복되는 것을 동시에 목격했다.
기사는 이미 사망했고
아이들은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고 있다.
경험적으로 5분후에 이 버스는 폭발할 것을 두 인물 다 알고 있다.
아이를 도우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잃을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5분 후 폭발을 예상하고도 아이들을 구하기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든다면
그는 그런 성격이다.
그러나 큰소리치면서 구조를 외치며 119에 전화를 하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정작 자신은 뛰어들지 않는다면, 그는 그러한 성격인 것이다.
이해되는가?
성격에는 반드시 사건이 연관된다는 것을?
자.
그러면 다음 단계로 나가보자.
스토리의 세계에서
인물의 성격은
깊이를 드러내게 될까? 아니면 단순한 모습 그대로일까?
우리 인간을 생각해보면 쉽다.
우리 인간의 성격 역시 매우 깊은 층위를 갖고 있다.
안톤 체홉의 작품에 묘사된 인물들 처럼
우리 인간들은 모두 다층적인 인물들이다.
위대한 꿈을 꾸는가하면, 눈앞의 욕정에 쉽게 흔들리기도 하고
이상을 꿈꾸기도 하지만, 현실 앞에 울부짖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벚꽃동산을 읽으면서 가장 슬픈 장면은 4막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두 장면이다. 하나는 그 허풍쟁이 귀족 가예프가 모두 퇴장하고 난 후 누이를 부둥켜안고 누가 들을까 두려워하며 숨죽여 우는 장면. 그리고 또 하나는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늙은 피르스가 마치 버려진 가구처럼 홀로 남겨져 쓸쓸히 화석처럼 웅크린 채 굳어가는, 혹은 죽어가는...누에고치처럼..,매우 강렬한 이미지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인간들이다.
스토리는
인간에 대한, 특별히 인간의 삶에 대한 메타포 즉 은유이므로
인간에 대한 통찰력있는 은유는 결국 다층적인 묘사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어떤 사건이 강렬하면 강렬할 수록
그 인물의 성격화의 과정은 더욱 더 깊이 드러나게 된다.
어쩌면 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라면
그 인물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던 인간성을 드러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건은 사건을 위해 존재하는게 아니다.
그저 관객의 흥미를 끌고
자극을 주고
흥미로운 스토리를 이끌어가기 위해서
사건이 존재하는게 아니란 거다.
사건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깊이있는 인간에 대한 성격화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예를들어
이창동의 <시>를 보자.
이창동의 <시>에서의 사건은
주인공인 미자 할머니 에게 안내상 배우가 슬슬 다가오며 어디로 가자고 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할머니가 따라갔더니
자살한 여중생을 강간한 동급생 6명 중 한명이
미자 할머니의 손자란다.
이런게 사건이다.
이 사건이
참 멋진 사건인 이유는
이 사건을 통해
미자는
깊이있는 인간성의 가장 밑바닥에 잠재된 인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씬은
미자는 현실도피적이며, 자신만의 공상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현실을 받아드리려고도 하지않고, 현실을 믿으려고도 하지않는다.
마치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에 나오는 귀족들과 같다.
그리고 우아한 세계의 코스프레에 빠져있다.
그런 그녀가
위에 소개한 사건을 통해
가장 깊숙한 곳에 잠재되어 있던
인간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
그것은
숭고한 책임이며
위대한 감행이며
목숨을 건 도박이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여중생의 영혼과 자신의 영혼을 일치시켰다.
영혼 밑바닥의 결합이다.
그녀는 자신의 성을 팔아 대가를 지불하고 돈 5백을 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목숨을 속죄양 삼아
구원을 이룬다.
그녀의 가장 깊은 성격화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게 플롯이다.
플롯에서
사건이 필요한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주인공의 깊은 성격화를 이끌어내기 위함이다.
인물의 성격화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입체적인 사건의 조직화가 필요하고
이것을 우리는 플롯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플롯을 위한 플롯은 필요없으며
소재를 위한 소재도 필요없고
미장센을 위한 미장센도 가치없고
반전을 위한 반전도 필요없다.
학생들이 쓴 글을 보면
반전을 위한 반전.
소재를 위한 소재.
묘사를 위한 묘사는 많으나
인간성을 드러내는 반전.
인간성을 드러내는 소재.
인간성을 드러내는 묘사는
없다.
정말. 너무나 찾아보기 힘들다.
이창동의 시를 보라.
그 모든 소재와 플롯구성과 사건과 점층과 묘사는
오직 한가지 목적
주인공 미자의 성격화를 위해
적중되어 있다.
김기덕의 피에타도 마찬가지다.
그 모든 사건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단 한가지.
주인공 강도의
성격화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채움받는
인간성에 대한 갈구.
그리고
그 인간성에 눈을 떴을때
강도는
더이상 머무를 수가 없다.
결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결국
그는 속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찢기우게 되는 것이다.
스토리 이론으로 본 맥베스 / 성격화와 인물의 역학관계
자. 그럼. 성격화와 플롯이 다른 용어가 아님을 이해했다면.
(아버지가 내겐 아버지이지만, 할아버지에겐 아들인 것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부르는 것일뿐. 스토리의 세계에선 본질적으로 성격화와 플롯은 같은 말이라는 것)
인물간의 역학관계에 대해 살펴보자.
스토리의 세계에서
인물의 성격화를 기준으로 플롯구성을 보면 신세계가 열리듯이,
인물들간의 관계나, 존재목적도
성격화를 통해서 보면 굉장히 쉬워진다.
예를들어
신세계의 주인공은
참 애석하게도 이정재다.
영화 내내 식은 땀을 흘리면서 별로 하는게 없는 듯 보여도
엄연히 이정재가 주인공이다.
왜?
성격화를 이루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이중성을 벗어던지고
하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그의 성격화를 드러내는 것이
영화 신세계의 플롯구성이기 때문이다.
이정재가 이중성을 벗고 그의 진짜 성격화를 드러내기 위해서
정청은
온갖 고난을 겪여야 하는 것이다.
즉
성격화의 과정으로 본다면
그는
촉발적인 캐릭터라 볼 수 있다.
주인공의 성격화를 촉박하는 캐릭터.
끝까지
그 역할에 충실함을 알 수 있다.
이중구는 뭔가?
이중구 역시 주인공의 성격화를 드러내기 위한 기능을 하고 있다.
이중구. 정청 모두
주인공 이정재의 마지막 성격화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의 인물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 상업영화는
반드시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변 인물들은 어떠한 역학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중구 역시 촉발하는 캐릭터이다.
진짜 안타고니스트는 바로 최민식이다.
최민식이야말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든 사건을 계획하며
주인공의 보스로서의 성격화를 이루기위한 목적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인물이다.
안타고니스트는 복잡한 성격화가 필요없다.
단 하나의 목적만을 충실히 수행하면 된다.
바로 주인공의 목적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민식에게는 어떠한 고민도, 정체성의 혼란도, 그리고 어떤 양심의 가책이나 깨달음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인물의 역학관계 속에서
주인공의 목적을 방해하는 역할을 맡은
충실한 안타고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안타고니스트가 복잡한 성격화를 가질 필요는 없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다층적 성격화를 가질 필요가 없다.
주인공 배트맨만 정체성의 변화. 즉. 영웅에서 어둠의 사도로의 추락을 이뤄내면 된다.
조커는 그 자체로 악으로서 완벽한 악. 목적없는 악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안타고니스트는 나쁜 놈이 아니다.
안타고니스트는 주인공의 목적을 방해하는 극적 기능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다면 올해 한예종 연극원 지정희곡이기도 한 맥베드는 어떠한가?
일단 맥베드의 인간성. 성격화는 어떻게 진행되는가?
결말을 보자.
결말에서 맥베드는 여자가 낳은 자에게는 죽지 않으리란 예언을 믿고 있으나
결국 제왕절개로 태어난 맥다프에 의해 살해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맥베드는 회개 혹은 뉘우칠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의지'로 거절한다.
항복같은 건 안한다. 먼저 졌다라고 외치는 놈이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
이것이 맥베드의 마지막 대사이다.
이런 결말은 매우 난해하다.
햄릿의 복수는 정당성이 있다. 그가 숙부를 죽이는 것은 이해가 된다.
리어왕의 죽음 역시 숭고한 인식이 있다. 인간은 어리석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인식이 그것이다. 눈이 뽑힌 노인과, 정신이 이상해진 노인 둘이서 황야를 헤매는 장면은 인간에 대한 인식의 극치이다.
오셀로 역시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 비극의 주인공 모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행동은 당위성이 있으며,
그들은 극의 종결에 이르러 깊이있는 성격화를 이뤄낸다는 것이다.
즉. 죽음을 통해 숭고한 인식을 드러내며 깊이있는 인간성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
맥베드는 그렇지 않다.
그는 어떠한 인식의 변화도 없고
깊이있는 인식도 없다.
그는 결국 변하지 않았다 !
그는 악 그 자체로 굳어진 채 목이 잘려 맥다프에 의해 조롱거리가 된다.
그런 그를 주인공으로 볼 수 있을까?
스토리 이론으로 본 맥베스 / 맥베스의 비극성 - 모순, 그리고 예언적 통찰
아이러니, 상승종결, 하강종결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 이론에 의하면
플롯은 마무리에 따라 상승종결과 하강종결, 그리고 아이러니로 구성된다.
주인공의 주도적인 아이디어가 성취되는 것으로 종결되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승종결. 즉. 해피앤딩이 된다.
7번방의 선물이 그렇다.
상승종결의 핵심은
절정에서의 추락이다.
주도적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가장 급격한 추락이 절정에서 나타난 뒤에
급격한 상승을 통해 해피앤등의 극적 효과를 배가한다.
7번방의 선물에서 류승룡이 살라고 그렇게 발버둥을 치지만 결국 사형당하는 장면이 절정이며
영화의 주도적인 아이디어를 기준으로 할때 가장 깊은 추락장면이다.
그러나 이런 추락을 준 이유는
이후의 상승을
드라마틱. 즉 급격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관객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상승시키기 위함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검사로 성장한 박신혜는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여, 모의 법정에서 아버지의 명예를 완전하게 회복한다.
이 두 장면 사이의 연결과
급격한 변화가 보이는가?
상승종결이 보이는가?
이것이 해피앤딩이다.
한편 하강종결이 있다.
예를들어 세븐같은 영화가 그렇다.
결국 악이 승리한다.
주인공의 주도적인 아이디어는 달성되지 못한다. (더이상은 스포일러라 생략)
내가 좋아하는 영화 <파이란>도 그렇다.
주인공의 주도적인 아이디어는 실패하며
악이 승리한다.
어떠한 깨달음도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가 있다.
즉.
주도적 아이디어에 비교해
상승과 하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레인 맨이 그렇다.
주인공은 목적하는 돈과 물질적인 성공을 잃었지만
그는 가족과 존중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얻었다.
상승과 하강이 동시에 존재한다.
낙관적인 아이러니 = 즉 회복의 플롯이라 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상승과 하강이 동시에 존재해서 주인공은 모든 것을 얻지만, 대신 그는 파멸하는 내용이다. 징벌의 플롯이라 한다.
<맥베드>가 위의 어떤 기준에 속할지를 구분짓지는 말자.
그게 뭐가 중요한가?
기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감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하나의 논리로 규정짓는 것은
mb의 대운하계획보다 훨씬 더 무모한 행위다.
맥베스는
결국
악이 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
인간성에 대한 통찰의 끝에는
끊없는 탐욕과 욕망과 광기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는 정도로 정리해두자.
그렇다면 이 탐욕스러운 맥베드가
인간에 대한 통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그가 가진 내적 모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순되기에
인간의 비극성을 드러낼 상징으로 충분하다.
욕망과 탐욕이라는 거대한 목적과
자의식과 양심과 광기라는 내면의 목적이
모순되며 충돌하는 것.
이것이 맥베드 비극의 원천이다.
즉. 이 작품은
외적인 사전에 집중하는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향해 파고드는 작품이다.
외적 사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인 갈등이다.
1606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매우 현대적인 주제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눈여겨보라.
현대의 작품들이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작품의 주제의식과 같이한다.
이 작품이 내적 모순을 상징한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바로 마녀들의 대사에 있다.
아름다운 것은 더러운 것, 더러운 것은 아름다운 것....
셰익스피어는 항상
가장 중요한 통찰을
가장 어리석은 등장인물들을의 대사속에 숨겨놓는다.
햄릿의 무덤지기들의 대사는 현대 실존주의 철학과 연결되고
황야에서 리어왕에게 던지는 광대의 대사 역시 20세기 철학과 연결된다.
한여름밤의 꿈에서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분신을 가장 어리석은 캐릭터 퍽의 대사에 숨겨둔다. 바로 연극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열정이다. 그리고 마치 분리된 플롯인듯 보이는 5막에서 선보이는 극중극은
현대 서사극 및 극장주의 연극에 대한 몇백년 앞선 예견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맥베스야 말로
가장 현대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라 할만하다.
모순되는 비극성.
절대 악으로 변신하며, 어떠한 긍정적 깨달음도 없이 사라지는 주인공 (몰락)
이것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부정성을 가진다.
마치 20세기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세계 대전과 학살을 거치며
현대 예술가들이 눈뜬 인간성을
몇 백년 앞서 예견하고 있는 것과 같이 느껴져 소름끼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외적 사건, 외적 플롯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세계와
내면의 갈등.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인간 내면의 세계의 갈등이 더 처참한 갈등임을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안톤 체홉이나 유진 오닐이 연상되기도 한다.
셰익스피어를 접하는 사람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쳐 그의 작품에 매료된다.
1단계 - 언어의 매력
2단계 - 작품구성의 매력과 풍부한 연극성의 매력
3단계 - 사회와 문화에 대한 깊은 통찰에 담긴 매력
그리고 마지막 4단계를 나는
4단계 - 인간에 대한 예언
으로
나누고자 한다.
무슨 말이냐면.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언어의 매력에 빠져들고, 좀 더 연구하면 구성과 짜임새, 그리고 풍부한 연극성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좀 더 깊이 연구하면 그 속엔 사회와 문화에 대한 통찰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가장 깊은 곳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에 대한 통찰이 심오한 나머지
그것이 몇백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재형으로 진행되는 그 기묘한 작품세계를 보라.
그의 작품에서 묘사하는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
20세기 인간에 대한 묘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그 예언적 통찰에 기준해서 작품세계를 보라.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 마력에 눈을 뜰때, 셰익스피어는 죽은 작가가 아니라 살아있는 작가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을 건다.
올해 한예종 연극원 지정희곡. <맥베드>가 바로 이런 작품이다.
결국 인간에 대한 냉혹한 예견 혹은 예언인 것이다.
http://blog.naver.com/lesson4karts
터놓고 연극영화와는 차별화된 보다 직접적인 입시분석, 및 학원홍보를 위한 강력한 컨텐츠로 꾸며가는 새로운 블로그가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부탁드립니다.
터놓고 연극영화는 계속 공익적으로 나가고, 새로 만든 블로그는 의도적으로 입시위주로 화끈하게 끌고 가 보겠습니다 !! 2014 한예종 최다합격의 기적을 이뤄갈 것입니다 !!http://www.lesson4karts.com 공식 홈페이지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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