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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말, '그래도...'about, intheatre 2013. 4. 27. 03:46
교보문고 앞을 일주일에도 몇번씩 지나간다.
교보문고에 걸리는 글 중에 마음에 드는 글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 걸려있는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가장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사랑해.
참 멋진 말이 아닌가?
우리는 너무 주고 받기에 익숙해져 있다.
네가 내게 이만큼 해줬으니 나도 이만큼 해줘야지...
돈이 세상의 중심이 되면서 나타난 가장 나쁜 일 중 하나가
바로
세상 모든 일이 거래가치로 둔갑해 버리는 일이다.
사랑도
가르침과 배우는 일도
그리고 존중과 존경도
모두
기브 앤 테이크가 되었다.
돈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거래가치이다.
거래가치란 말은
너는 가치가 이 정도이고
나는 가치가 이 정도이고
우리는 가치가 이 정도라는
어떤 수치적인 정량화, 숫자화이다.
우리는 은근히
우리의 숫자적 가치를 정하고 살아간다.
그게 가장 극심하게 드러나는 시기가
우선 초중고를 거쳐 확립되는 입시체계이다.
내가 대학들어갈 98년도만 해도 전국 석차도 나왔다.
우리는 등급같은건 없었거든.
전과목 수능반영이었기에
나는 전국 몇 등인 줄 알수 있다.
숫자이며, 거래차이의 확인이다.
그러나 입시를 거쳐 직장을 구할때
또 한번의 숫자전쟁에 들어간다.
나의 거래가치는 또 한번 정해진다.
나는 연봉 얼마짜리...너는 연봉 얼마짜리...
심지어는 사랑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조차
거래가치로 둔갑한다.
SBS 프로그램 '짝'이나, 듀오같은 결혼중매회사나...
거래차기를 넘어 매매가치가 된다.
여학생들은 이런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매우 깊이 와닿을 것이다.
진절 머리가 나지 않는가?
이 지긋지긋한 거래가치의 사회...
이 거래가치는 이젠 우리 자신의 내면까지도 '대상화'한다.
나는 지방대출신, 나는 비인기전공출신...나는 별로 특출날 것도 없는 가난한 연극배우...
나는 대학진학도 못한 실패한 입시생...나는 한번도 호감가는 이성과 사귀어본 적이 없는 연애의 실패자...
식민주의적 역사관이란 게 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탈식민주의 인데
그 유명한 존 버거의 'the Ways of Seeing'을 보면
사진에 대한 분석에서
사진 속 피사체는 반드시 누군가를 의식하고 자신을 노출한다.
즉
사진에서 보이는 대상은 어떤 면에선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은
사진에 노출된 피사체 뿐만이 아니라
그 피사체가 자신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주인', 그를 통제하는 주체를 아는 것이다.
보여주는 자와 보는 자와의
어떤 관계.
그것은 힘의 관계일 수도 있고
권력의 관계일 수도 있고
마성의 관계일 수도 있고
이데올로기의 관계일 수도 있다.
사진분석은 바로 이 보이지 않는 힘의 관계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작업이다.
우리가 존 버거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 바로 이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데 참 비극적인 일은
자신을 보여주는 자가
보는 자가 규정한
어떤 이미지를
저항없이 자신의 이미지로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가장 비참한 존재의 몰락이다.
예를들어,
한국인은 패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있다.
일제에 의해 규정되어진 이미지를
한국인인 우리 스스로가 무저항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이미지로 둔갑시켜 버린
매우 비참하고 자기모멸적인 단어이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조나단 라슨의 유명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도 대표적인 예이다.
그 뮤지컬에 나오는 동양여성은
가정이 있는 서양남성이 아무렇게나 유린하고 버려도
지고지순하게 기다리고 희생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서양이 보기에 동양은
언제나 그런 대상이었다.
식민주의시대에
마음껏 수탈하고 점령하고 지배해도
그 수탈하는 서구열강을 흠모하고
따라하고자 하고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생각과 그들의 삶의 패턴을
모방하고자 해왔다.
자. 여기서 네게 하나 물어보겠다.
너는 정말로 위와 같은 '대상화'에서 자유로운가?
정말 솔직히 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너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사회가 규정한 이미지에서
경제논리가 규정한 이미지에서
남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너는 과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느샌가
너의 존재가
그것임을
스스로 받아들여 버리진 않았는가?
왜 인간에게 실존적 자각이 필요하냐면
실존적 자각이
바로 이 사회와 문화와 종교와 철학이 슬그머니 대상화시켜버리는
나의 존재를
회복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내 존재를 내가 규정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실존주의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책들을 섭렵했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다.
실존주의자들은 삶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베르 카뮈.
그리고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만 당당히 거부한 장 폴 샤르트르.
모두
실존주의자로 분류되는데
실존주의는
주체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신 앞에선 단독자 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너의 존재를 실존적으로 규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단 한명있다.
그것은
신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니고
선생도 아니고
터놓고 연극영화 블로그도 아니고
네 남자친구, 여자친구도 아니고
바로
너
너
자신이다.
자. 그렇다면 오늘의 제목으로 돌아가서
다시 위의 시를 읽어보자.
교보문고 간판에 걸린 바로 그 글귀.
가장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사랑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말은
그래도 란 단어이다.
어떠한 어려움과
어떠한 실망과
어떠한 좌절과
어떠한 몰락이 있어도
우리가
'그래도'란 단어를 붙잡는 한
우리의 실존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도'라는 단어를 붙잡는다면
우리는
대상화에서 벗어 날 수 있고
거래가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심취하는 것은
거래가치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의 비극은,
거래할 수 없는 것.
거래해서는 안되는 것을 거래하려 하고
숫자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
숫자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을
판단하려 했기 때문 아닌가?
예술가의 열정을
어떻게 거래가치와 숫자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엄마의 볼을 간지럽히는 아기의 손가락을
어떤 거래가치로 표현할 수 있는가?
노을이 지는 해변가를 손 맞잡고 걷는
연인의 긴 그림자를
누가 숫자로 환산할 수 있겠는가?
야구잠바를 세트로 맞춰입고
야구배트와 글러브를 엉거주춤 안고서
야구공을 주고받는
아빠와 아들을
무엇으로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너는
'그래도'라는 말만 붙들고 살기를 바란다.
너 자신에게 실망하더라도
'그래도' 난 나를 사랑해 !
사랑하는 사람의 어떤 연약함을 보더라도
'그래도'난 당신을 사랑해!
부모님의 어떤 실수나 이해가 되지 않는 억압이 있더라도
'그래도'난 부모님을 사랑해!
네가 선택한 길 때문에 네가 힘들어지더라도
'그래도' 난 이 길을 가는걸 사랑해!
예술가의 길이 힘들고 고되더라도
'그래도' 난 예술을 사랑해...
근사하지 않은가?
'그래도'란 단어는
진실로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래도'라는 단어만 붙들 수 있다면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다.
어떤 몰락 속에서도
우리의 실존을
놓지 않을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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